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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트렌드&] 국내 철도차량 조달 시장 ‘최저가 입찰제’ 우려 목소리 높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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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품질·기술력이 아닌 업체 간 가격 경쟁 격화로 철도 부문 사고 잇따라


1단계 기술 평가 최저 점수 넘기면
2단계 최저가 써낸 업체 선정 구조
무리한 저가 수주, 납품 지연 등 문제
기술과 가격 종합적 평가 제도 필요

철도는 탈선이나 고장 등 문제가 발생하면 시민에게 큰 불편을 끼치고 대형 인명피해로도 번질 수 있어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교통수단이다. 사진은 운행시속 320km 성능을 자랑하는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EMU-320. [사진 현대로템]

철도는 탈선이나 고장 등 문제가 발생하면 시민에게 큰 불편을 끼치고 대형 인명피해로도 번질 수 있어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교통수단이다. 사진은 운행시속 320km 성능을 자랑하는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EMU-320. [사진 현대로템]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본격 시행으로 기업의 안전과 기술, 사회적 책임이 산업계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규모로 시민을 수송하는 철도 부문에서 안전사고가 잇따르며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철도는 열차 탈선이나, 사고, 고장 등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노선 지연으로 인한 시민의 큰 불편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대형 인명피해로도 번질 수 있어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철도차량 조달 시장은 ‘시민 안전’을 담보할 품질과 기술력이 아닌 ‘최저가’의 논리대로 흘러가고 있다.

정부가 유일한 발주처인 국내 철도차량 시장에는 ‘2단계 규격·가격분리 동시 입찰제’가 뿌리 박혀 있다. 이 입찰제는 1단계 기술 평가에서 최저 점수만 넘기면 되는 ‘Pass or Fail’ 방식으로 진행된다. 최종 단계인 2단계에서는 가격만 따져보고 최저가를 써낸 업체를 최종 낙찰자로 선정하는 구조다.

‘최저가 입찰제’는 기술력과 안정성, 적기 납품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하더라도 누구나 최저가를 적어 내면 공급업체가 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런 입찰제도에서 철도차량은 발주량마저 한정적이고 불확실하다 보니 국내 철도차량 제조업체 3사(다원시스·우진산전·현대로템)는 저가 수주와 수익성 악화 굴레에 내몰리며 ‘치킨 게임’을 이어가고 있다. 결국 열차 품질도 하향 평준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고 발생 위험 높은 노후화 열차 많아

지난 5월 개통한 서울 신림선은 지속적인 고장 이슈로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지난달 17일과 18일에는 열차를 다른 궤도로 옮기는 분기기 부근 안내 레일에 이격이 생겨 긴급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전동차가 자체 고장이 발생하는 등 문제로 연이어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개통 한 달만인 지난 6월에도 열차가 고장으로 멈추는 사고가 났는데 당시 차량 문이 1시간가량 열리지 않아 승객들이 갇혀있어야 했다. 지난달 6일에는 서울 용산역을 출발해 전북 익산으로 가던 무궁화호 열차가 영등포역으로 진입하던 도중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처럼 열차 사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잠재 사고 발생 위험이 높은 노후화 열차 교체는 선제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국내 철도차량 2만2179량 중에서 운행 기간이 20년 이상인 철도차량은 총 1만1739량(52.9%)으로 절반 이상이 철도차량 수명을 넘기거나 기대수명에 도달하고 있었다. 철도차량 기대수명은 차량 제작 당시 기대했던 성능을 유지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의미하며 통상 25년 안팎이다.

철도차량 노후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신차 납기 지연 문제로 차량 교체 시기가 늦어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최저가 입찰제 하에서 신규로 시장에 진입한 중견 업체들이 기술 평가를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생산 능력을 벗어나는 무리한 저가 수주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11월 기준 우진산전이 낙찰받은 2·3호선 전동차 196량 사업은 납품이 최대 677일까지 지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원시스가 납품할 5·7호선 전동차 336량 사업 역시 최대 434일 지연되고 있다.

최저가 입찰제의 맹점은 지난해 4월 부산 1호선 전동차 200량 교체 사업 입찰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국내 3개 제조업체는 1단계 기술평가에서 최소 기준인 85점을 모두 통과했지만 2단계에서 최저가를 적어낸 우진산전이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최저가 입찰제로 업계 순위도 지각변동

최저가 입찰제 도입으로 업계에선 순위 지각변동도 일었다. 최근 3년간 우진산전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국내 전동차 시장에서 총 1조1945억원(53%)의 수주를 가져갔다. 다원시스가 7317억원(32%)으로 뒤를 이었고, 현대로템이 3412억원(15%)으로 가장 저조한 성적을 올렸다.

출혈 경쟁이 격화하는 환경 속에서 국내 철도차량의 최종 낙찰단가는 해외 평균 수준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 최근 3년(2020년~2022년) 국내에서 경쟁 입찰로 수주가 이뤄진 사업을 보면 차량당 평균가는 11억7500만원 수준이다. 과거 10여 년간 차량당 가격과 비교해 봐도 물가상승률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있다. 반면 최근 3년 해외에서 발주된 전동차 사업의 차량당 단가는 약 30억원 수준이다.

고속차량 시장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6년에 코레일이 발주한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EMU-320은 량당 33억원에 최종 낙찰됐다. 이는 해외 고속차량 가격이 차량당 약 50~70억원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절반 수준이다.

최근 스페인 ‘탈고(TALGO)’가 국내 중견업체와 손을 잡고 수익성보다는 동력분산식 고속열차의 제작 및 납품 실적 쌓기를 최우선으로 코레일의 고속철 발주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도 단순히 가격경쟁력만 확보하면 사업을 따낼 가능성이 높은 최저가 입찰제 허점을 노린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향후 2027년부터는 900여 량의 KTX-Ⅰ노후화에 따른 교체 물량이 순차적으로 발주될 것으로 예상하는 상황에서 국내 철도차량산업의 점유율이 떨어지면 내수는 물론 수출 경쟁력마저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

저가 중국산 부품 의존도 점점 높아져

저가 응찰을 위해 국내 업체들이 낮은 품질의 중국산 부품 사용 유인도 늘고 있다. 실제 국내 철도차량 업체들의 저가 중국산 부품 의존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관세청의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수입액은 2015년 1948만3000달러에서 2021년 7592만5000달러로 꾸준히 오름세를 유지했다. 수입 규모는 6년 만에 4배 가까이 몸집을 불리며 중국산 부품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스페인 탈고의 국내 진입을 두고 지난 9월 국내 철도차량 부품업체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국회 앞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해외처럼 국내 시장에도 마땅한 국내 철도차량 부품산업을 보호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경우 시행사가 발주하면 입찰 초청서를 발송한 업체들만 입찰 참여가 가능하다. 여기에 자체 규격 규정인 ‘TSI’로 비유럽 국가의 진입을 사실상 원천 차단하고 있다. 스페인 역시 자국에서 발주한 철도차량 사업에 해외 업체가 참여하려면 적합성 여부를 종합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중국은 자국법인과 공동응찰을 의무화하고, 완성차는 70% 이상, 전장품은 40% 이상 자국 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면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 이 밖에도 미국은 ‘바이 아메리카 규정’을 적용해 입찰 시 재료비의 현지화 비율을 70% 이상으로 정했다. 일본도 해외 업체의 시장 진입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한 철도 전문가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속철에는 ‘협상에 의한 계약’ 방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며 “다수 입찰자로부터 제안서와 가격입찰서를 제출받아 기술과 가격을 분리하지 않고 종합 평가해 우선협상 대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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