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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보냈더니 "4500만원 내라"…아이티 구호품 험난한 여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갱단이 활개 치는 탓에 아이티 현지 치안이 매우 불안합니다. 구호품을 안전하게 옮길 수 있을지도 걱정되는 상황인데, 관세로 3만5000달러를 요구해 막막합니다.”

지난해 8월 14일(현지시간) 규모 7.2의 강진으로 무너진 아이티 남서부 항구도시 레카예의 한 호텔. AP=연합뉴스

지난해 8월 14일(현지시간) 규모 7.2의 강진으로 무너진 아이티 남서부 항구도시 레카예의 한 호텔. AP=연합뉴스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원승재 부산소망성결교회 목사는 4일 중앙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아이티를 30여회 오가며 봉사와 구호 활동을 했는데 이번이 가장 어렵다”라고도 덧붙였다.

포스코 도움에 아이티 간 구호품, 다시 위기

지난해 8월 규모 7.2 강진이 아이티를 덮쳐 난민 3만여 가구가 발생하자 삼성여고와 삼성중 재학생 등은 이들을 돕기 위해 구호 물품을 모았다. 두 달 만에 옷가지와 신발·담요 등 생활필수품 8만여 점(약 1억2000만원)이다.

원승재 목사는 당시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부산시 허가를 얻어 구호품 모집을 주도했다. 부산지역 공단과 교회 등을 직접 돌며 구호품 아이티 발송을 위한 성금을 모았다.

하지만 컨테이너 4개 분량인 구호품은 아이티로 가지 못하고 부산 삼성여고 운동장과 강당 등지에서 10개월간 발이 묶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선박 물류비용이 크게 뛴 탓에 애초 2000만원으로 예상한 물류비가 1억원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삼성여고 학생들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구호품을 아이티로 보내는 것을 도와달라”는 편지까지 썼다. 하지만 이 사안을 검토한 외교부는 현행법상 정부 부처가 직접 지원하기는 어렵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다.

부산시민들이 모은 아이티 지진 구호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지난 8월 10일 부산 삼성여고 운동장을 출발하자 포스코플로우 직원들이 손을 흔들며 환송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부산시민들이 모은 아이티 지진 구호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지난 8월 10일 부산 삼성여고 운동장을 출발하자 포스코플로우 직원들이 손을 흔들며 환송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결국 포스코 물류 분야 계열사인 포스코플로우㈜가 배편을 수배하고 물류비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구호품을 실은 컨테이너 4개는 지난 8월 10일 삼성여고 운동장을 떠나 아이티로 향했다.

갱단 장악된 아이티 세관 “관세 4500만원”… 평소의 3배

아이티로 가는 여정도 순탄치 않았다. 지진이 났을 때 손상된 포르토프랭스항은 여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포스코플로우는 파나마 발보아, 멕시코 만사니요 등지를 거쳐 해상에서 소형 선박으로 옮겨싣는 계획을 통해 구호품을 포르토프랭스항으로 보냈다. 구호품은 지난 9월 15일 도착했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원 목사는 곧장 구호품 전달을 위해 아이티로 가려 했지만 ‘위험 지역’인 이곳으로 가기 위한 정부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가 아이티에 입국한 건 지난 10월 7일이다. 그 사이 아이티 현지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연료 부족 문제 등 기근이 이어지며 아리엘 앙리 총리 퇴진 시위가 격화했고, 갱단이 일으킨 소요사태 탓에 국가 기능은 마비되다시피 했다. 아이티는 상황 수습을 위해 국제사회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고,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아이티 인구의 절반인 470여만명이 기아에 고통받고 있다며 대응을 촉구했다.

 지난 8월 9일 부산 삼성여고 운동장에서 아이티로 보낼 물품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원승재 목사. 김민주 기자

지난 8월 9일 부산 삼성여고 운동장에서 아이티로 보낼 물품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원승재 목사. 김민주 기자

원 목사는 “포르토프랭스항 세관이 구호품에 대한 관세로 4000만원 넘는 거액을 요구하는 것 또한 큰 어려움”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아이티로 여러 차례 구호품을 들여왔다. 통상 컨테이너 하나당 관세 3000달러를 넘긴 적이 없다”며 “그런데 이번 구호품을 실은 컨테이너 4대에 평소 3배에 가까운 3만5000달러(약 4500만원)를 청구했다”고 했다.

원 목사는 치안 약화와 식량 수급 문제 등이 겹치자 아이티 세관이 외국 물자에 이처럼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많은 분 도움으로 어렵게 구호품을 이곳까지 옮겨왔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세관 측과 관세 문제를 협의하는 한편 포르토프랭스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솔레시티까지 구호품을 옮길 안전한 경로를 수배하고 있다. 그곳 난민에게 구호품을 무사히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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