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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 팔만 늘어진 이유…2년만에 세계 놀래킨 옷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 옷은 좌우 길이가 달라요. 한쪽 팔만 늘어져 있죠. 아이가 ‘엄마 일하러 가지 말라’고 붙잡는 거예요.”

제18회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 수상자 박상연(40)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애슐린(ASHLYN)’의 새 시즌 컬렉션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디자이너이자 일하는 여성으로서 일상을 옷에 녹였다는 의미다. 지난 29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비이커 매장에서 박 디자이너를 만나 인터뷰했다.

지난 29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비이커에서 '애슐린(ASHLYN)'의 박상연 디자이너와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삼성물산

지난 29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비이커에서 '애슐린(ASHLYN)'의 박상연 디자이너와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삼성물산

애슐린은 일명 ‘팬데믹 베이비’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2020년 만들어진 브랜드라서다. 박 디자이너는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모드를 거쳐 분카패션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는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 ‘요지 야마모토’에서 일했다.

“3년 동안 월급 130만원으로 버텼어요. 힘들었지만 큰 자산이 됐죠. 이후 뉴욕에 가니까 모두가 저를 ‘요지 야마모토 출신’으로 불러줬어요.”
2011년에 한국에 돌아와 뉴욕 기반 디자이너 브랜드 ‘알렉산더 왕’에 이력서를 냈다. 뉴욕으로 떠나 3년간 여성복 디자이너로 일한 뒤, ‘캘빈 클라인’으로 옮겨 당시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였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와 함께 일했다.

애슐린(ASHLYN) 2023 봄여름 컬렉션. 사진 애슐린

애슐린(ASHLYN) 2023 봄여름 컬렉션. 사진 애슐린

알렉산더 왕 시절 첫 아이를 낳았고, 지금은 두 딸의 엄마다. 그리고 일명 ‘미친 일상’이 시작됐다. 경쟁이 치열한 패션 업계에서 여성 디자이너가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을 쌓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한 살짜리 아이를 서울로 두세 번 보내 가며, 경력을 이어갔다.

코로나19로 직장을 떠난 뒤, 자신의 브랜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떠올린 것은 자신의 일상이었다. “결국 패션 디자인도 ‘나’에 대한 얘기더라고요. ‘어떤 디자인을 할까’보다, ‘내가 누군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가면서 옷을 만들었어요.”
현재 비이커 청담점에 전시되고 있는 그의 최신 컬렉션의 제목은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다. 팬데믹 시절, 엄마라는 정체성을 직시하면서 만든 브랜드를 통해 회복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재킷이나 트렌치코트·드레스 등 격식을 갖춘 옷들이면서도, 저지 소재 등을 활용해 늘어나는 느낌을 더한 것이 포인트다. 아이가 팔을 당기는 것 같은 늘어진 소매나, 겉과 속이 뒤집어져 주머니가 밖에 달린 ‘반전 디자인’은 옷을 뒤집어 입을 정도로 바쁜 일상을 표현한다.

애슐린(ASHLYN) 2023 봄여름 컬렉션. 사진 애슐린

애슐린(ASHLYN) 2023 봄여름 컬렉션. 사진 애슐린

저지 소재에 드레이핑(입체 재단)으로 주름이 잡혀 일견 ‘쉬운 옷’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꼼꼼한 패턴이 밑바탕을 이뤄 어디 하나 과하거나 허술한 부분이 없다. 이는 일본에서 패턴을 뜨던 시절의 영향이다. “패턴을 떠가면 요지 야마모토가 질문해요, ‘왜 이 주머니가 여기 달렸을까?’ 라고요.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게 ‘고수’라는 걸 그때 배웠어요.”

그의 정교한 디자인은 최근 업계의 화두인 ‘지속가능성’과도 연결된다. 완벽한 재단을 통해 버려지는 직물 자투리를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네모반듯한 직물에 목 라인과 암홀(소매 둘레)을 기술적으로 배치해 어떤 자투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드레스로 만든 작품인 ‘딜런 셔츠’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일요일 오전에 미술관으로부터 온 메일이 ‘스캠(사기)’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와서 애슐린의 실크 드레스를 사 갔다고 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영구소장된 애슐린의 '딜런 셔츠' 드레스. 사진 홈페이지 캡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영구소장된 애슐린의 '딜런 셔츠' 드레스. 사진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에는 프랑스 럭셔리 기업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가 주관하는 ‘2022 LVMH 프라이즈’ 최종 후보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독보적인 테일러링, 완성도 있는 드레이핑 기술, 섬세한 장인정신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삼성패션디자인펀드 역시 애슐린의 독창성·완성도·상업성 등의 항목에서 점수를 줬다. 특히 지속가능성 철학을 바탕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부분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운영하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는 지난 2005년 만들어져, 17년간 한국 디자이너 25개 팀을 배출하고 총 360만 달러(약 47억원)를 후원했다. 수상자에게는 디자인 창작 활동을 위한 후원금 10만 달러(약 1억3000만원)와 국내외 홍보·사업 지원이 뒤따른다.  

“폐기물을 줄이고, 옷장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서 지속가능성을 실천하는 것도 좋지만, 패션 업계의 일하는 환경을 바꾸는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지속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이를 키우면서 직업을 연장하기 어려우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요즘은 아무리 바쁜 시즌이어도 직원들에게 ‘9시 출근·5시 퇴근’을 강조합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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