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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취색 ‘청자멍’에 빠져볼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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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호 18면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비색’ 방 오픈

비색과 조형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국보 5점을 360도 회전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한 ‘고려비색’ 방. 박종근 기자

비색과 조형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국보 5점을 360도 회전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한 ‘고려비색’ 방. 박종근 기자

소극장 크기의 전시 공간, 어둠을 통과하는 진입로, 미세하게 기울어진 바닥과 벽, 아스라한 반짝임을 주는 천정. 현재를 벗어나 다른 차원에 있는 듯 추상적이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국보 78호·83호 반가사유상을 만날 수 있는 곳. 국립중앙박물관 내 위치한 ‘사유의 방’이다. 지난해 11월 개관한 이 공간은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함께 전시하는 상설전시장으로 기획된 후 색다른 공간 연출과 전시 방식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오픈 1년 만에 ‘사유의 방’을 찾은 누적 관람객 수 66만명을 기록했다. SNS에선 “불멍(장작불을 보며 멍하게 있는 것)보다 반가사유상멍”이라는 후기가 돌면서 ‘서울에서 꼭 가봐야 할 핫 플레이스’로 인기다.

지난 11월 23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사유의 방’의 명성을 이을 ‘고려비색’ 방을 공개했다. 박물관 내 3층에 있는 도자공예실 중 ‘청자실’을 새로 단장해 개관하면서 고려 비색청자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공간이다.

가을하늘 한 조각 같은 비취색 청자

‘고려비색’ 방에 각각 독립적으로 전시된 상형 청자들. 모두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다. 세 마리의 토끼가 받치고 있는 ‘청자 투각 칠보무늬향로’. 박종근 기자

‘고려비색’ 방에 각각 독립적으로 전시된 상형 청자들. 모두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다. 세 마리의 토끼가 받치고 있는 ‘청자 투각 칠보무늬향로’. 박종근 기자

‘비색(翡色)’이란 절정기에 이른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취색을 말한다. 중국 송나라 때 사신 서긍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한 후 남긴 『고려도경』에는 ‘고려인이 청자 종주국인 송나라 청자의 비색(祕色)과 구별하여 고려청자의 색을 비색(翡色)이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송나라와 고려의 청자 빛깔 한자가 다른 것에 대해 미술사학자 강경숙씨는 『고려청자』(고유섭 저, 열화당)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중국에서 청자의 색을 ‘祕(숨길 비)色’으로 표기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송나라 청자의 祕色과는 다른, 고려만의 독특한 비취옥에 비유되는 색감에 자부심을 갖고 독자적으로 ‘翡(비취옥 비)色’으로 표기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고려비색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색일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월탄 박종화 선생은 그의 시 ‘청자부’에서 “가을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하늘 한 조각”이라 표현했고,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선생은 “비가 개고 안개가 걷히면 먼 산마루 위에 담담하고 갓맑은 하늘빛”이라고 비유했다.

‘청자 사람모양 주자(주전자)’. 박종근 기자

‘청자 사람모양 주자(주전자)’. 박종근 기자

이번에 공개된 ‘고려비색’ 방에는 비색청자 중에서도 비색과 조형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형청자(인물이나 동·식물을 본따 만든 청자) 18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국보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청자 사람모양 주자(주전자)’ ‘청자 어룡모양 주자’ ‘청자 사자모양 향로’ ‘청자 귀룡모양 주자’ 다섯 점은 각각 사이를 넓게 두고 독립적으로 전시해 관람객이 360도 회전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박물관의 이애령 미술부장은 “다들 청자가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정작 청자의 어떤 점이 아름다운지, 비색은 어떤 색인지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한다. 그래서 청자의 진짜 아름다움을, 비색의 빛깔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방”이라며 “청자실 입구에 일부러 올리브색 등 발생 초기의 청자를 전시한 것도 고려인들이 완벽한 비색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소개했다. 청록색이 칠해진 벽에는 그물처럼 짠 검정색 금속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시스루 옷을 입은 것처럼 청록색과 검정색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이 부장은 “고려불화를 보면 관음보살의 몸을 얇고 투명한 사라가 감싸고 있다”며 “소중한 문화유산을 잘 감싸듯 정성을 다해 ‘고려비색’ 방을 꾸몄다”고 했다.

박물관은 청자실을 몰입형 감상공간으로 특화하기 위해 청각효과도 도입했다. 일단 청자실에 들어오면 잔잔한 음악 ‘블루 세라돈’이 흐른다.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프로듀서인 다니엘 카펠리앙이 작곡한 곡으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오롯이 청자의 세계와 마주할 수 있도록 관람객을 유도한다.

‘청자사자모양 향로’. 박종근 기자

‘청자사자모양 향로’. 박종근 기자

무엇보다 가장 애를 쓴 부분은 ‘비색’이 비색으로 보일 수 있도록 조명을 맞추는 일이었다. 자연광에서 가장 완전한 비색을 감상할 수 있다는데, 실내에서 인공조명으로 자연광을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실험을 반복하면서 근사치를 찾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유물을 놓는 바닥의 색과 질감은 물론 빛반사도 고려해야 한다. 상형청자는 그 모양이 저마다 달라서 빛을 반사하는 지점과 그림자가 떨어지는 지점도 각각 다르다. 한 마디로 아주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고귀한 어른 다섯 분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이 부장은 “이분들을 볼 때마다 ‘날 잘 챙기고 있겠지?’ 묻는 것 같아 정말 진땀 났다”며 웃었다.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은 “청자는 고려인의 파란 꽃”이라 말한 바 있다. 또 “청자는 화려한 듯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고요한 맛이 있다”고도 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파란 꽃 하나가 맑게 빛나면서 마음을 고요히 어루만져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박물관이 ‘제2의 사유의 방’을 기대하는 점도 바로 이런 명상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키오스크로 청자 상감기법 볼 수 있어

‘청자 어룡모양 주자’. 박종근 기자

‘청자 어룡모양 주자’. 박종근 기자

‘고려비색’ 방을 둘러싼 청자실 전체에는 ‘청자 참외모양 병’ 등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총 250여 점의 청자가 전시돼 있다. 그중에는 전북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 수집한 상감청자 조각들도 전시됐다. 완형을 알 수 없는 깨진 조각들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파초잎에서 쉬는 두꺼비, 물가에서 노니는 왜가리 등 서정적인 자연풍경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청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 자연임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들이다. 비록 깨졌을망정 천년을 버텨온 청자 조각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시간의 무게를 표현한 오수 작가의 이끼 연출이 함께 전시된 모습도 매력적이다.

‘청자 귀룡모양 주자’. 박종근 기자

‘청자 귀룡모양 주자’. 박종근 기자

한편, 청자실 곳곳에는 화면 확대 기능을 갖춘 첨단 키오스크 시스템이 설치돼 있어서 미처 몰랐던 청자의 세계로 관람객을 인도한다. 예를 들어 ‘고려인이 사랑했던 식물과 동물’ 키오스크에선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미세한 크기의 그림 또는 뒷면과 바닥에 새겨진 문양들을 볼 수 있다. ‘고려자기 장식기법’ 키오스크에선 음각·양각·압출양각·철화 등의 청자 기법을 실감할 수 있고, ‘상감기법’ 키오스크에선 장인이 직접 상감기법으로 도자를 만드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청자에 새겨진 한자를 해석해주는 키오스크도 있다. 예를 들어 ‘청자 상감 넝쿨무늬 잔’에는 삼배시(三盃詩·술 석 잔을 마시며 짓는 시)가 적혀 있는데 내용이 이렇다.

‘하늘이 허락하거든 넉 잔째 술을 마실 수도 있네/ 석 잔의 술은 모두 다 마셨지/ 어떻게 마셨는가 두 잔째 술은/ 역시 웃음띠고 넉넉히 마셨지/ 넉 잔째 술을 웃으며 마신다.’

비색청자 잔에 술을 마신다면 그 누구라도 행복한 마음으로 넉 잔째 술을 마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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