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애도로 포장한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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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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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서 연일 김의겸이 김의겸 하는, 그러니까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본적인 팩트체크조차 없이 아니면 말고 식 폭로나 거짓말을 남발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화판에서는 문소리가 또 문소리 했다. 과거 주요 선거 때마다 박원순·문재인 등을 공개 지지하면서 세월호 사건 등 굵직한 국면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 야당 지지층으로부터 대표적인 개념 배우로 꼽히는 문소리가 지난달 25일 밤 KBS가 생중계한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기에 하는 말이다.

배우 문소리는 지난달 25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이태원 참사로 숨진 지인을 언급했다. 애도로 그치지 않은 정치적 발언에 불편했다는 사람이 많다. [사진 방송 캡처]

배우 문소리는 지난달 25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이태원 참사로 숨진 지인을 언급했다. 애도로 그치지 않은 정치적 발언에 불편했다는 사람이 많다. [사진 방송 캡처]

그는 이날 여우주연상 시상자로 나서 이태원 참사로 목숨을 잃은 한 지인을 실명으로 언급했다. "늘 무거운 옷 가방 들고 다니면서 나랑 일해준 안○○. ○○야 너무 고마워, 사랑해. 네가 얼마 전에 10월 29일 날 숨 못 쉬고 하늘나라로 간 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이런 자리에서 네 이름 한번 못 불러준 게 굉장히 마음 아팠고. "
본인이 상을 받은 주인공도 아니고 시상자로 나와 이런 발언을 하는 게 뜬금없긴 하지만 이쯤에서 그쳤다면 본인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로 고생한 젊은 친구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커서 그랬으려니 하고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이나 시청자들 모두 이해하고 함께 애도했을 거다. 그런데 역시 문소리다웠다. 대신 "진상 규명되고 책임자 처벌 되고 그 이후에 더더욱 진짜 애도를 할게"라며 이태원 참사를 앞세워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부르짖는 촛불 집회 연단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정치적 발언을 이어갔다.

영화상 나와 정치 발언한 문소리 #유족 슬픔 부추겨 포획하는 야권 #죽음마저 도구 삼는다는 비판

우연히 시상식을 라이브로 지켜보다가 순간 애도(哀悼)의 뜻이 헷갈렸다. 말 그대로 죽음을 슬퍼하는 게 애도인데 문소리가 내건 조건부 '진짜' 애도라는 건 대체 뭘까 싶어서다. 솔직히 슬프지 않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진짜 슬퍼해 주겠다는 시혜적 태도인가. 안타까운 사고의 원인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시스템 부실을 밝혀 재발을 막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이걸 왜 애도와 연결지을까.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그날 이 말을 들은 적잖은 시청자는 본능적으로 이런 의심을 했을 법하다. 정말 평소 아꼈던 지인을 애도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의도를 위해 한 인간의 죽음마저 도구로 삼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말이다.

지난달 19일 윤석열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연단에 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왼쪽부터 민형배(무소속), 양이원영, 강민정, 안민석, 유정주, 황운하, 김용민 의원. 연합뉴스.

지난달 19일 윤석열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연단에 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왼쪽부터 민형배(무소속), 양이원영, 강민정, 안민석, 유정주, 황운하, 김용민 의원. 연합뉴스.

한 배우의 돌출 발언을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거론하는 이유는 이날 문소리의 발언이 이태원 참사 이후 일부 야당 의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촛불 집회에서 보여준 행태와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달 19일 촛불 집회 당시 김용민·안민석·양이원영·유정주·황운하(민주당)·민형배(무소속) 등 야당 의원들은 이태원 사망자 명단과 유족 영상이 나온 연단에 서서 잠시 희생자를 애도하는 척했지만 결국 "윤석열 정부는 인간 사냥을 멈추고 퇴진하라"는 대선 불복을 넘어서는 비이성적인 정치적 의도를 드러냈다. 이러니 이태원 사망자가 이들 야당 인사들에겐 그저 윤 정부 퇴진을 위한 불쏘시개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그리고 민변 주도로 기획된 일부 유족의 지난달 22일 기자회견을 놓고 작가 한지원이 "누군가 형언할 수 없는 가족들의 슬픔을 포획하여 정치적 보복으로 가공하고 있다"고 탄식했던 바로 그 애도로 위장한 정치적 선동이 비단 민변 사무실이나 서울 도심 촛불 집회에서만이 아니라 이날 청룡영화상 무대에서도 표출된 셈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건 이 날 문소리의 발언은 단순히 그의 편향된 정치색을 드러내는 데 그친 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론 위선을 스스로 드러내는 계기도 됐다는 점이다. 스타일리스트를 보조하는 어시스턴트는 연예계의 대표적 약자다. 퀵 비용보다 싸게 먹히는 인건비로 하루종일 자기 몸만큼 무거운 옷 가방을 날라야 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에다 따라다니는 연예인의 일정에 무조건 맞춰야 하는 탓에 표준 근로 시간이라는 게 무의미하다. 그런 격무에도 연장근로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소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일찌감치 민주노동당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세월호나 미투 운동처럼 주목도 높은 사안에는 어김없이 정치적 발언을 했던 그가 늘 함께 일하는 촬영 현장 스태프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사회적 목소리를 냈다는 얘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주변 약자가 겪는 부조리에는 눈을 감으면서 그런 약자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또다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기 위해 소재로 삼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이번 문소리의 발언을 보고 새삼 깨닫게 됐다. 비단 문소리뿐만 아니라 지금 윤석열 퇴진이라는 두 단어에 함몰돼 이태원 참사를 둘러싸고 온갖 몰상식을 일삼는 야당측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다.
김의겸은 연일 김의겸 하면서 그가 과거 얼마나 기본에서 거리가 먼 기자였는지 스스로 폭로했다. 문소리는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