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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사우디에서 다시 쓰는 ‘횃불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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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이인실 특허청장

이인실 특허청장

“아빠가 떠나신 지 사계절이 갔는데 낯선 곳 타국에서 얼마나 땀 흘리세요.”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1979년에 발표된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라는 노래의 첫 소절이다. 이 노래는 당시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아버지를 열사(熱沙)의 땅으로 보내야 했던 가족들의 심금을 울리며 인기를 끌었다고 기억한다.

우리나라 건설 역군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중동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밤마다 수백 개 횃불로 어둠을 밝히며 24시간 3교대로 공사를 진행했고, 이를 본 사우디 국왕은 우리나라에 더 많은 공사를 맡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75년 7억5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건설 수주액은 1980년 82억 달러로 10배 이상 늘었다. 이 일화는 ‘횃불신화’로 불리며 한국인의 근면성과 성실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양국 수교 60주년이 되는 지금은 어떨까? 2019년 6월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우리나라를 방문해 ‘사우디비전 2030’ 실현을 위한 협력에 합의했다. 이 중엔 우리나라의 지식재산 전문가들을 사우디 지식재산청에 파견한다는 협력계약도 포함됐다. 이 계약을 통해 그간 총 15명의 특허청 심사관이 사우디 현지에서 국가지식재산 전략수립, 지식재산 제도개선, 특허·상표 심사관 역량 강화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과거 우리 아버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식재산 역군들이 사우디에서 보이지 않는 횃불을 밝히며 묵묵히 우리의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특허청은 1977년 개청 이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지식재산 4대 강국으로 성장했다. 2020년에는 모바일 매체로 상표를 출원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시하고, 지난해에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상표 이미지 검색시스템을 심사업무에 적용하는 등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혁신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올해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의 글로벌 혁신지수 6위, 지식재산 전문매체인 WTR(World Trade Review) 혁신평가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사우디를 포함한 많은 국가가 우리 특허청에 관련 경험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80년대 근면성과 성실성, 그리고 가난을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사우디에서 피와 땀을 쏟았던 건설 역군들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제 지식재산 역군들의 차례다. 우리 특허 전문가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새로운 ‘횃불신화’를 써 내려 갈 것을 기대해 본다.

이인실 특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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