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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정경유착 단죄하는 푸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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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러시아의 과두 재벌(올리가키)에 대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표적사정 칼날이 날로 예리해지고 있다. 집권 초 러시아의 대표적인 올리가키 베레조프스키와 구신스키를 제거한 데 이어, 지난 10월 25일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유코스'의 사장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전격 구속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 당국은 호도르코프스키 구속의 표면적 명분으로 횡령, 조세 포탈, 사문서 위조, 공무집행 방해 등 경제비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과두 재벌들이 막강한 자금력과 초창기 사유화 과정에서 정치권에 음성적으로 제공한 정치자금을 활용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영구화하고 여야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정치 로비를 펼쳐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푸틴의 통치 스타일로 보아 불과 10여년 사이 무일푼의 평범한 시민에서 러시아 최대 재벌로 급부상한 호도르코프스키에 대한 단죄는 일면 예고된 것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3월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푸틴이 경제에 대한 악영향을 협박하는 재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속을 단행한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올리가키의 과도한 정치개입 차단이다. 올리가키는 소련 해체 이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석유.가스.금융.전력 등 러시아 핵심 산업의 '노른자위'를 독차지하면서 태동했다. 이들은 정경유착의 특혜 속에서 성장했다.

1996년 옐친의 재선 여부가 불투명할 때 막대한 사업이권을 담보로 올리가키들이 '옐친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것이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 옐친이 재선에 성공하자 그 반대급부로 각종 특혜를 요구했고 정치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올리가키들은 기득권 보호와 사업이권 확대를 위해 언론사를 설립하거나 주요 언론의 지분을 장악하면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고, 막후에서 국정을 농단하는 거대한 불가사리로 성장했다.

이로 인해 국가권력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고 통치권 누수 현상이 점차 심화해 갔다. 따라서 강한 러시아의 건설을 천명한 푸틴에게 취약한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올리가키들은 시급히 제거해야 할 공적 제1호이고, 호도르코프스키 체포는 그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

둘째는 시장개혁의 걸림돌 제거다. 러시아 올리가키는 약탈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은 정치권과의 검은 연계를 통해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했고,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갔다. 공공연한 탈세는 물론이고 부를 해외로 빼돌림으로써 연방재정의 궁핍화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세제개혁, 은행 구조조정, 국가경쟁력 강화 등 각종 정부정책에 완강히 저항하는 암적 존재였다. 따라서 시장개혁의 심화를 위해서는 과두 재벌의 폐해가 척결돼야 하는데, 경제개혁의 발목을 잡는 올리가키는 어떻게든 손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셋째는 12월 총선에서의 안정적인 의석 확보다. 호도르코프스키는 야블로코당.우파연합(SPS).공산당 등 반(反) 크렘린 성향의 정당에 자금과 조직을 지원해 왔다. 호도르코프스키의 반크렘린 세력 결집행위는 자칫 여소야대를 초래할 수 있고, 이는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확보하려는 푸틴에게 정치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론 옐친세력의 후견주의와 단절을 꾀하는 푸틴의 '홀로서기'다. 무명의 푸틴이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엔 옐친 대통령과 그 주변에 포진한 옐친 패밀리, 그리고 이들과 밀접히 연계된 올리가키의 지원이 있었다. 그래서 푸틴의 집권 1기는 옐친계와 푸틴계 측근의 동거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옐친 패밀리와 유착된 호도르코프스키가 체포되고 이에 반대한 옐친계 볼로쉰 행정실장의 사표가 수리됐다는 사실은 푸틴의 친정체제 구축 강화를 의미한다.

향후 올리가키들이 어떤 식으로 반격을 가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푸틴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와 강력한 리더십을 토대로 개혁정책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차단하고 내정의 안정을 통해 강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푸틴의 노력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비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완석 한국외대 교수.러시아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