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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38세 때 김일성은 전쟁, 김정일은 후계자 등극, 김정은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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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북 최고지도자 3대의 길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인민복을 입은 김일성 주석(1994년 사망)이 한반도 지도가 걸린 방에서 “친애하는 동포들”로 시작하는 육성연설을 1분 동안 이어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직후 상황이다. 당시 내각 수상이던 김일성은 연설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성된 정세를 토의하고 우리 인민군대에 결정적 반공격전으로 싸워 적의 무장력을 소탕하라고 명령을 내리였다”고 연설을 끝냈다. 한국군이 북침했는데, 북한군이 이를 격퇴하고 반격에 나섰다는 주장이 이날 연설의 골자다.

한·미에 대한 북한의 반응 달라져
‘말대 말’ ‘행동대 행동’ 위기 고조

김정은 “핵물질 쟁여놓으라” 첩보
이달 초 미사일 장면 4월 것 재탕

미국 “북한 핵사용하면 정권 종말”
전쟁 위협보다 평화의 길 걸어야

김 주석이 6·25전쟁을 일으킨 1950년,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올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나이와 같다. 할아버지(김일성)-아들(김정일)-손자(김정은) 3대 세습체제를 구축한 북한에서 최고지도자가 38세가 되는 해에 한반도엔 ‘격변’이 벌어진 건 공교로운 일이다.

북한이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라는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켰고,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은 38살에 공식 후계자로 등극했다. 1970년대 초 이미 후계자에 내정된 김정일이 38살 된 80년에 ‘후대 수령’으로 공식 발표됐다. 이후 김정일은 미사일과 핵개발을 주도하고 직접 챙겼다고 한다. 북한에선 김정일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 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조선’을 지켜냈다고 칭송을 받는다.

빨치산 전술에서 맞짱 전술로

김일성 주석이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후 한반도 지도가 걸린 방안에서 육성연설을 통해 전쟁 발발 소식을 알리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김일성 주석이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후 한반도 지도가 걸린 방안에서 육성연설을 통해 전쟁 발발 소식을 알리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28살이던 2012년 최고지도자에 오른 김정은 위원장은 사회주의의 완성과 인민 복지를 내세웠다.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지킨’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로 ‘완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애민사상을 내세우며 북한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에 매진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올해 38살이 된 김 위원장은 한국과 미국을 향해 ‘할아버지가 일으킨 전쟁’을 연상시킬 만큼 위험한 행보를 하고 있다.

2017년 아버지(김정일)가 시작한 핵개발을 완성했다고 선언하고 이듬해 핵 실험장을 폭파했던 그가 올 들어 핵 실험장을 복구했다. 지난 9월 선제 핵공격을 강조하는 법을 만들고 최근엔 전술핵무기 장착 가능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지난 2일엔 분단 뒤 처음으로 북방한계선(NLL) 이남 해역에 미사일을 떨궜다. 한국군, 한·미연합군 훈련 때마다 매번 미사일과 포격으로 맞서며 위협 수위를 높이기도 한다. 미국이 확장억제력을 강조하자 최선희 외무상이 “군사 대응은 더욱 맹렬해질 것”이라며 위협했다. 북한이 입버릇처럼 강조해온 ‘행동대 행동’ 과 ‘말대 말’ 방식으로 맞짱 전략을 구사하는 양상이다. 과거 상대방의 방심을 틈타 공세에 나섰던 빨치산 전술의 변화다.

북한이 엄포만 놓는 게 아닐 수도 있다. 7차 핵실험 가능성은 올 초부터 계속 주목을 끌어 왔다. 이번 핵실험은 소형 전술핵무기 실험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7차 핵실험으로 전술핵을 완성하면 전략핵무기만 있을 때보다 더 세밀해진 위협을 감당해야 한다.

북한은 아직 레드라인을 넘지 않고 있다. 어쩌면 핵 실험장을 복구하고 영변의 핵시설 가동을 멈추지 않는 등 ‘시늉’을 하면서 주변국이 긴장하는 걸 즐기는지도 모른다. 김 위원장이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HEU) 등 핵물질 보유량을 늘리라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는 첩보도 있다고 한다. 첩보가 사실이라면 북한은 당분간 핵물질을 ‘낭비’하는 핵실험보다 시늉에 집중하며 간 보기를 할 가능성도 있다.

핵실험 강행으로 한층 강해질 제재에 견디려면 ‘창고’가 차 있어야 하지만 이미 쪼그라든 경제 때문에 쉽지 않다는 점도 핵실험을 안 하는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7차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김 위원장이 공개석상에서 한동안 사라졌다가 복귀하면서 대형 ‘사고’를 쳤던 일들이 몇 차례 있었다. 공개활동을 중단한 채 새 전략을 가다듬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을 준비하는 식이었다. 김 위원장이 지난 9월 9일 정부수립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두문불출하다가 한 달이 지난 지난달 10일 나타나 전술핵 운용부대 군사훈련을 지도했다고 밝힌 것이 가장 최근의 사례다. 당시 한국을 위협하는 미사일과 공군기 훈련 등 군사 행동 9가지를 공개했다. 지난달 17일 모교인 노동당 중앙간부학교를 방문했던 김 위원장이 다시 한 달 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내년 초 시정연설이나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표할 새로운 ‘충격적’ 전략을 준비하는 건 아닌지….

중국이 북한을 자제토록 해달라는 한국의 요구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거나 실제로 ‘내 갈길’을 선택한 북한을 제어할 능력도 없어 보이는 점도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 주석은 윤 대통령의 담대한 계획을 지지할 수 있다고 했지만 “북한이 응한다면”이라고 조건을 붙였다.

공개석상에서 또 사라진 김정은

북한의 도발 강도가 세질 때마다 미국의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배치해 경고하는 한·미의 대응 방식은 이미 효력이 떨어진 듯하다. 북한의 위협은 잰걸음인데 대응은 예전 그대로다. 한국 미사일이 뒤로 발사되거나 어디에 떨어졌는지 파악조차 못 한 일도 화근이다. 전투기에서 발사한 첨단 미사일이 불발한 일도 있었다. 김 위원장도 낱낱이 파악할 것이 분명한 사안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북한이 아직은 엉성하다는 점이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괴물 미사일’ 화성-17형은 최근까지 발사에 성공하지 못했다. 증거로 제시한 미사일 발사 장면 사진이 옛날 것이거나 포토샵으로 ‘아름답게’ 포장한 일도 많았다. 한·미 연합훈련인 비질런트 스톰에 대응한다며 이달 초 쐈다고 공개한 사진(노동신문 7일 2면)이 4월 17일자 KN-23발사 장면과 티끌까지 겹친다. 한·미 정보당국이 파악한 발사 원점과 차이가 있거나 발사 종류가 다른 경우도 있다. 기만책일 수도 있지만 공개하지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지난주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세 나라가 공동으로 북한 위협에 대응키로 합의했다. 김 위원장이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6·25를 일으킨 김일성은 미국이 한국을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이 발표된 것을 호기로 삼았다. 그러나 올해 미 국방부는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경우 정권의 종말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2 핵태세 보고서) 한국군의 무장 수준이나 조국 수호 결의도 그때와는 천양지차다.

김정일 시대 북한은 자폭정신, 총폭탄 정신을 강조하곤 했다. 자폭(自爆)은 내가 희생함으로써 국가를 살리는 정신이다. 북한이 핵을 가졌다고 선언한 뒤로는 자폭정신을 강조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지금 시대에 핵무기 사용은 ‘자신을 터트리는’ 자폭행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김 위원장이 할아버지가 38살 때 일으킨 전쟁을 코스프레하기보다 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공동선언, 2018년 판문점 선언을 되새겼으면 한다.

북한에 어머니날은 있고, 어버이날은 없는 이유

11월 16일은 북한의 ‘어머니날’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첫 해인 2012년 어머니날을 제정했고, 2020년부터는 공휴일로 정해 대대적인 축하행사와 함께 어머니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어머니날은 한국의 어버이날에 해당하는데, 김일성 주석이 생전인 1961년 1차 전국어머니대회를 주관한 날이 기원이라는 게 북한의 설명이다.

북한이 별도로 어버이날 또는 아버지날을 두지 않은 건 정책적으로 여성을 우대하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차원이다. 북한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 30일 남녀평등법을 제정했는데, 봉건적인 억압에서 여성을 해방한다는 논리였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북한에서 여성을 우대한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차원일 수 있다.

북한 사회에서 ‘어버이’라는 말이 수령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라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말대사전』은 어버이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울러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사전은 동시에 “‘인민대중에게 가장 고귀한 정치적 생명을 안겨주시고 친부모도 미치지 못할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분’을 끝없이 흠모하는 마음으로 친근하게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북한에선 어머니당, 아버지 장군님, 어버이 수령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며 “육체적 생명은 유한하지만 정치적 생명은 무한하다는 논리(사회정치적 생명체론)를 펴고 있는데 정치적 생명을 더욱 중요시하는 북한이 어버이날이라고 할 경우 이런 논리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