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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공들이고도 "또 고쳐야한다"는 번역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 김희영

중앙일보

입력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 한국외대 김희영 명예교수. 사진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 한국외대 김희영 명예교수. 사진 민음사

"아직도 끝난 것 같지 않아요. 지금도 고치고 싶은 데가 너무 많고, 금방 개정판을 내야할 것 같아요."

13권 번역본 완간 #번역자 김희영 인터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가 평생에 걸쳐 쓴 유일한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국어 번역본(민음사)이 13권으로 완간됐다. 2012년 첫 책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온 이후 10년만이다.

10년간 총 5704쪽, 방대한 분량을 번역한 건 김희영(73)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다. 그는 16일 서울 강남의 민음사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 출간 100주년인 2012년에 국내 번역본을 냈는데, 이번엔 사후 100주년을 맞춰 완간하게 돼 기쁘다"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상에서 느끼는 세밀한, 일견 하찮은, 부스러지기 쉬운 조각들을 한 데 모으는 삶의 글쓰기"라고 말했다.

"처음엔 1권만 내려다가…" 10년 대장정 된, 2500명 등장하는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국어 번역본이 13권으로 완간됐다. 원서는 7권짜리 소설이다. 사진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국어 번역본이 13권으로 완간됐다. 원서는 7권짜리 소설이다. 사진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 마르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총 7편 짜리 장편소설이다. 등장인물을 다 합치면 약 2500명, 마르셀이 관찰하는 인간 군상들이 백과사전처럼 펼쳐지고 당시의 사회상도 함께 빼곡히 그려진 대하소설에 가깝다.

이전에 국내 첫 번역본(김창석 번역, 국일미디어, 1985)이 있었지만, 김희영 교수는 이후 여러 주석과 분석이 덧붙어 1987년 출간된 플레이아드 전집을 기반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2005년 출판사에서 처음 제안을 받았지만, 망설임이 길어 2012년에야 1권이 나왔다. 김 교수는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구색을 맞춰야 한다고 해서 1권만 내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보니 이건 전체를 다 읽어야만 진가가 드러나는 거였다"고 전권 번역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두문불출하며 10년간 5704쪽, 편집자도 책 내고야 처음 만났다

김 교수는 한국외대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석‧박사 과정으로 프루스트를 연구했다. 평생 프랑스 문학을 읽고 번역하고 가르쳤지만, 직접 쓴 책은 딱 한 권(공저), 번역한 책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외하고는 5권 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번역은 그가 평생을 몰두한 가장 큰 작업이다. 2014년 정년 퇴임 후에는 두문불출하며 번역에만 집중해, 민음사 담당 편집자와도 이메일로만 소통하고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을 하는 동안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며 "처음에는 오전 4시에 일어나 작업을 시작했지만 갈수록 밤 12시부터 작업을 하는 패턴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집중력을 유지하며 쓸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6~8시간 뿐이고, 원서 기준으로 하루 3쪽 정도 분량이라고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그는 "프루스트를 통해 오히려 제가 많은 위안을 받았다"며 "같은 시대의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프루스트가 덜 알려진 것 같아 불문학자로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미완성 후반부, 오히려 프루스트와 어울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 한국외대 김희영 명예교수. 사진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 한국외대 김희영 명예교수. 사진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긴 문장으로 유명하다. 한 문장이 페이지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고, 한 페이지를 꽉 채우기도 한다. 가장 긴 문장은 931 단어에 달한다. 김 교수는 한글과 어순이 다른 프랑스어를, 원문의 흐름 그대로 옮겼다. 가장 어려운 건 지금은 사라진 언어를 좇는 일이었다. 그는 "마당에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장면 묘사가 있는데, 사전으로는 '움막'이나 '오두막'으로 번역되는 단어(guérite)라 상황에 도무지 맞지 않았다"며 "당시의 백과사전을 봐야만 '의자'인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프루스트는 생전에 7권 전체의 개요를 모두 썼지만, 수정 작업을 거친 끝에 출간한 1~4권과 달리, 5~7권은 프루스트 사후에 발간돼 그의 수정이 덜 들어간, 말하자면 미완성본이다. 김 교수는 "마무리 못한 작품들은 문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특히 『사라진 알베르틴』은 미완성작"이라면서도 "그렇지만 그게 프루스트랑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삶은 끊임없는 글쓰기'이고, 완성 없이 계속해서 풀려가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어릴 때부터 '안 끝나는 소설' 좋아한 소녀… "프루스트 택한 것 기뻐"

그는 "어릴 때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등 긴 책을 좋아했다"고 했다. 평생 소설을 읽으며 사는 게 꿈이었는데, 결국 그 꿈을 이룬 셈이다. 김 교수는 대학교 4학년 때 처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만났지만 "당시는 시위가 많아서 한 학기에 수업을 두세 번 밖에 듣지 못했고, 1권 '마들렌' 부분만 수업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며 유학을 가서야 프루스트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읽다 보니 추억의 물방울에서 이어지는 생각이 거대한 건축물로 확장되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하찮은 일상적 삶의 조각을 건축물로 만드는 게 문학의 힘이구나 싶었다"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거창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매일 느끼는 감각·감동·분위기·기분 등이란 걸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지난 10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프루스트는 삶에 대한 호기심이 놀라울 정도로 많고, 디테일의 중요성을 보여준 작가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 생각하며 늘 행복했다"고 했다. 이어 "작품 전반적으로 악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도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해하려는 마음을 보였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선의가 작품을 지탱하는 큰 축"이라며 "프루스트를 평생의 동반자로 택한 걸 감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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