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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한국어마을 '600만불 사나이'...그는 원래 '핸드백 장사꾼'이었다 [속엣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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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추기자의 속엣팅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9일 오후 경기도 의왕 시몬느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87년 아시아 최초 럭셔리 핸드백 브랜드를 지향하며 창업한 그는 40년 만에 세계 시장점유율 10%를 차지하는 기업을 일궜다. 전민규 기자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9일 오후 경기도 의왕 시몬느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87년 아시아 최초 럭셔리 핸드백 브랜드를 지향하며 창업한 그는 40년 만에 세계 시장점유율 10%를 차지하는 기업을 일궜다. 전민규 기자

 한국의 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는 코치, 마크제이콥스, 도나카란뉴욕(DKNY), 랄프로렌, 토리버치 등 세계적인 브랜드 제품을 만든다. 럭셔리 핸드백 시장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0%를 차지하는 이 업체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기준 핸드백 수출만으로 매출 1조원을 기록했다. 소비자가 기준으론 8조원에 육박한다. 미국 1~7위 핸드백 브랜드를 모두 만들어내는 이 회사를 창업한 박은관(67) 회장을 지난 9일 경기도 의왕시 본사에서 만났다.

박 회장은 본업이 ‘핸드백 장사꾼’이라면 부업은 ‘인문학 후원자’다. 그는 30년째 한독번역연구소를 후원하면서 시몬느 번역상을 제정했고,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 한국어 교육을 돕고 있다. 2020년 연세대엔 윤동주기념관 건립을 후원했고, 핸드백 제조업계에 만연한 일본어 용어를 뜯어고치려고 2017년 600페이지 분량의 『핸드백 용어사전』을 펴냈다. 그가 “가장 보람있게 돈을 쓴 일”이라고 꼽는 일이다.

“나 혼자 후원해서 무슨 의미?”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9일 오후 경기도 의왕 시몬드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전민규 기자

박은관 시몬느 회장이 9일 오후 경기도 의왕 시몬드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했다. 전민규 기자

그가 요즘 가장 공들이는 건 미국 미네소타주에 한국어 마을 ‘숲속의 호수’ 건물을 완공하는 일이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숲속의 호수’를 알게 된 그는 이 프로그램을 만든 로스 킹 UBC 교수에게 먼저 연락해 장학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다. 3000달러(약 400만원)에서 시작한 후원금은 3만, 5만, 10만 달러로 늘어 지금까지 후원한 금액만 600만 달러에 육박한다.

그중 대부분이 한국어 마을 건립에 쓰였다. 약 7년 전, 킹 교수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한국어 마을은 건물이 없어 러시아 마을에 ‘셋방살이’ 한다”는 사정을 듣고 그 자리에서 500만 달러 기부를 약속하면서다. 그의 지원으로 건립하기 시작한 한국어 마을 건물은 현재 절반까지 완공됐다고 한다. 당초 예산은 1000만 달러였지만, 현재는 물가상승으로 더 늘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내가 비용을 다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다 내서 ‘박은관 빌리지’, ‘시몬느 빌리지’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다. 그는 “내가 90%를 대더라도 나머지 10%는 100명, 1000명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올해부턴 매칭펀드를 진행 중이다. 다른 후원금이 모이면 그와 같은 금액을 박 회장이 부담하는 식이다. 그렇게 올해 보탠 돈이 60만 달러다.

“막차” 지적에 “럭셔리 카는 타보지도 못해”

박은관 회장은 “우리의 재산목록 1, 2호는 본사 장인들의 경험과 경력을 합친 6500년, 본사 직원 400명”이라고 했다. 시몬느는 1년에 6000~7000개 스타일을 개발한다. 전민규 기자

박은관 회장은 “우리의 재산목록 1, 2호는 본사 장인들의 경험과 경력을 합친 6500년, 본사 직원 400명”이라고 했다. 시몬느는 1년에 6000~7000개 스타일을 개발한다. 전민규 기자

박 회장은 ‘뱃사람’이었다. 인천 제물포에서 최대 규모 수산업을 하던 아버지 덕에 방학마다 3~4주씩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다. 형들은 아버지 사업을 도왔지만, 박 회장은 대학을 졸업한 뒤 “딱 3년만 중소기업에서 해외영업을 배우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 그저 해외에 가보고 싶어서”였다. 79년 12월 그렇게 입사한 곳이 핸드백 회사였다.

그는 특유의 근성과 감각 덕분에 서른살에 영업총괄까지 승진했다. 그는 “내가 개발한 가죽으로 내가 디자인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결국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87년 시몬느를 창업하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주변에선 “제조업의 시대는 끝났는데 왜 막차를 타냐”는 걱정이 쏟아졌다. 그는 “럭셔리 카는 아직 타보지도 못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전 회사에서 납품하던 미국 백화점 기획상품이나 중저가 브랜드가 아닌, 유럽의 지방시, 버버리, 루이뷔통 같은 명품 브랜드를 겨냥했다. 최초 고객사가 DKNY였다. 그 후로 “한국 시몬느라는 업체가 이탈리아 가죽을 사서 만드는데 가격은 이탈리아산보다 10~20% 저렴하고 품질이 좋더라”, “(유럽에선 쉬는) 8월에도 일하고, 납기일도 잘 맞춘다더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고객사가 급격히 늘었다. DKNY를 비롯해 고객사와 인연을 한 번 맺으면 끊긴 적이 없다.

그의 인문학 사랑에는 수십 년 전 들은 한 강연도 한몫했다. “기업인의 궁극적인 목적인 배움, 이룸, 나눔”이라는 강사의 말에 매료됐다. 여기에 그는 “이룸과 나눔은 같이 갈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무감독 시험으로 유명한 제물포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선 원칙을 배웠고, 대학에선 열린 감성, 자유로운 생각, 호기심을 배웠다”고 했다. “패션은 감성과 상상력이 풍부해야 가치가 더해진다”면서다.

이제 70살을 앞둔 그는 사실 “사업적으론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했다”고 말했다. 유일하게 남은 과제가 파슨스디자인스쿨과 진행하다 중단된 ‘서울 디자인 인스티튜트’ 설립이다. 디자인뿐 아니라 소재와 기술 개발, 패턴 메이킹, 제조 방법까지 아우르는 커리큘럼을 구상 중이다. “이제는 사업적으로는 많이 했으니 여행도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려고 해요. 일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살아보니 또 그것만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에필로그] 박은관 회장이 시몬느의 자체 브랜드로 내놓은 ‘0914’의 청담동 플래그십 스토어는 건축가 유병안 ‘건축집단 MA’ 대표가 완공했습니다. 그 인연은 ‘숲속의 호수’까지 이어졌습니다. 유 대표는 박 회장에 대해 “다른 건축 프로젝트에서 실패해도 같은 사람한테 맡기는 게 이해가 안 돼 ‘왜 더 크고 좋은 기업에 맡기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세 번까지는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냐’고 한 말씀이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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