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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한국어 마을의 한옥 설계한 이 사람…창고세일 14년째, 왜 [속엣팅]

중앙일보

입력

추기자의 속엣팅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건축가 유병안이 6일 서울 마포구 '건축집단 MA' 사무실에서 ‘숲속의 호수’ 조감도를 옆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이곳을 완공하기 위해 그는 클라이언트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후원을 요청한다. 김상선 기자

건축가 유병안이 6일 서울 마포구 '건축집단 MA' 사무실에서 ‘숲속의 호수’ 조감도를 옆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이곳을 완공하기 위해 그는 클라이언트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후원을 요청한다. 김상선 기자

미국 미네소타주엔 한국어 마을이 있다. 이름은 ‘숲속의 호수’. 이 마을의 입구는 특별하다. 건물이 보이지 않게 설계돼 있어서다.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소나무숲을 가장 먼저 만나고, 건물이 그 뒤에 숨어있다. ‘ㄷ’자 중정을 품은 기숙사를 지나면 그 뒤에 거대한 호수를 향하는 축의 끝에 ‘진짜’ 한옥이 자태를 드러낸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를 오마주한 건물로, 한국어 프로그램 이수를 마쳤다는 상징이다. 아직은 총 14채 중 2채만 지은 미완성 상태다.

이런 설계를 한 이는 건축가 유병안(51ㆍ건축집단 MA 대표). 그는 완공을 위해 클라이언트들에게 편지를 써서 후원을 요청하는 ‘영업사원’까지 자처한다. 그는 갤러리 시몬, 사월 호텔, 양원성당 등을 설계하고, 청담동 도산공원의 랜드마크인 핸드백 플래그십 스토어 ‘0914’를 완공했다. 90년대 수차례 대한민국 건축대전에 입상하고 대한주택공사 주택설계공모전 대상(1996)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프리츠커 아니면 상은 준다고 해도 안 받는다”고 한다. 유 대표를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MA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국어마을 설계하고 후원 편지도 

그는 “건축은 굉장히 오래 걸리고 멀리 봐야 하는 일인데 우리는 너무 이성적으로 접근하니 건축이 이 모양”이라고 쓴소리부터 했다. “우리 건축은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고 형태만 화려하면 박수받는다”면서다. 건축 일은 아니지만, 그는 오는 15일 ‘창고 세일’을 진행한다. 햇수로 14년, 26번째다. 옷장 정리를 하면서 직원들에게 재미 삼아 옷을 팔아 시작한 기부가 이제는 동네 축제가 됐다. MA는 매년 크리스마스이브 종무식 때 저소득층 아이들을 초청해 장학금과 선물을 전달한다.

북카페를 연상시키는 건축집단 MA 사무실. 입구에 큰 태극기가 걸려있어 태극기 부대라는 오해도 받았다고 한다. 해군시설장교 출신인 유병안 대표는 군 제대 후 미국 유학을 갔다가 곳곳에 성조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감명 깊었다고 했다. 그는 “태극기도 이미지 개선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북카페를 연상시키는 건축집단 MA 사무실. 입구에 큰 태극기가 걸려있어 태극기 부대라는 오해도 받았다고 한다. 해군시설장교 출신인 유병안 대표는 군 제대 후 미국 유학을 갔다가 곳곳에 성조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감명 깊었다고 했다. 그는 “태극기도 이미지 개선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유 대표는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건 아버지를 닮았다”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명지학원 설립이사 유용근 박사다. 명지학원 설립자인 형 유상근 박사와 함께 평생 학교를 꾸렸다. 39살에 결혼해 매년 결혼기념일에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가족사진을 찍었다는 아버지는 2018년 4월 집에서 51번째 촬영 후 5일 만에 돌아가셨다. 유 대표는 자신이 태어난 집터에 아버지가 34년 전 새로 지은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형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유 대표가 건축가를 꿈꾸게 된 것도 아버지 서재에서 명지대 용인 캠퍼스 청사진을 보고서다. 그는 “암모니아 냄새가 풀풀 나는 파란색 그림이 너무 멋져 보였다”고 했다. 그는 명지대 진학을 원하는 아버지에게 “거길 왜 가냐”고 했다가 “내가 평생 일군 학교를 자식들이 무시한다”는 아버지의 한탄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MA도 명지대 건축학도 4명이 남산의 작은 작업실에서 모여 만든 ‘유양정하 연구소’에서 출발했다. MA는 16년 전 인테리어회사와 통합하면서 출범한 법인으로, 거장 건축가(Maestro Architect)가 되겠다는 뜻을 담았다.

후배 죽음이 꿈꾸게 했다, 시간을 초월한 건축  

가혹하게도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자주 겪었다. 10년간 8명을 갑작스럽게 잃었다. 특히 거의 매일 함께 술을 마시던 후배가 이상하게 연락이 안 돼 3일째 집에 찾아갔다가 숨진 걸 발견한 이후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매일 걸으며 치유했다는 그는 “세상에 없는 걸 만들겠다는 막연한 꿈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 있는 건축을 하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고 말했다. MA가 ‘시간을 초월한 건축’을 표방하는 이유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짓겠다는 것을 넘어 ‘왜’를 생각하면 인간을 위한 건축이 된다”고 했다.

유병안 대표는 오는 15일 건축집단 MA 사무실 앞에서 26번째 창고 세일을 연다. 사진은 지난 5월 21일 열린 창고세일. 1년에 2번씩 진행하는 창고세일 수익금은 연말 종무식 때 마포구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전달한다. 사진 유병안

지난 5월 21일 서울 마포구 건축집단 MA 사무실에서 열린 창고세일에서 가수 노영심(왼쪽)과 유병안 대표. 사진 유병안
지난 5월 21일 서울 마포구 건축집단 MA 사무실에서 열린 창고세일. 1년에 2번씩 진행하는 창고세일 수익금은 연말 종무식 때 마포구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전달한다. 사진 유병안

수많은 프로젝트 중 그가 가장 아끼는 건축물은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시골 마을의 ‘인보성당’이다. 5개월 넘게 그가 웹사이트에 가끔 올리는 글을 읽어왔다는 한 신부님의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교통비만 받은 사실상 자원봉사였다. 성당이 앞 도로와 뒷 도로 사이에 위치해 신자가 아닌 이들도 자유롭게 통행하는 구조다. 유 대표는 “내가 가진 건축 역량과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다 드러난 건축물”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민머리에 검정 옷을 즐겨 입는 스타일 때문에 동네에서 한때 조폭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는 그는 이제 ‘마(MA) 사장’으로 통한다. “TV에 나오는 유명한 의사도 좋지만, 따뜻한 동네 의원도 중요하잖아요. 그런 동네 건축가를 꿈꿔요. 유의미한 디딤돌을 하나 놓으면 다음 세대엔 한국에서도 프리츠커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요.”

[에필로그] ‘숲속의 호수’ 측은 당초 설계 후보자로 스타 건축가 8명의 명단을 작성해뒀다고 합니다. 유병안 대표는 거기에 없었죠. 초대 촌장 로스 킹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 교수는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유 대표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기립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킹 교수는 유 대표에 대해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위한 일은 끝까지 놓지 말라’고 당부한 덕분에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면서 몇 번이나 “너무나 멋진 건축가”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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