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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채권은 ‘AAA급 블랙홀’ 시중자금 빨아들여 돈맥경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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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정부의 자제 권고에도 공공기관들이 채권 시장에서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10일 국가철도공단은 2년 만기 연 5.839% 금리에 2400억원 규모 채권을 발행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도 지난 4일 2년 만기 회사채를 발행해 5.659% 금리로 2100억원 어치를 조달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역시 9일 2년 만기에 5.826% 금리를 제시해 1100억원을 조달했다. 인천공항 관계자는 “채권 발행을 최우선 조달 방안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채권 발행은 은행 차입 대비 금리가 낮고 대규모 자금 조달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지난달 30일 정부는 자금 시장의 경색 해소를 위해 공공기관에 채권 발행을 최대한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대신 은행 대출로 자금을 조달하라는 것이다. 최우량 신용등급(AAA)인 공공기관이 대규모 채권 발행에 나서면서 일반 회사채가 시장의 외면을 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하지만 정부 ‘말발’은 도통 먹히지 않는 모습이다. 정부는 공기업이 채권 발행보다 은행 대출로 자금을 조달하도록 금융지주의 지원 약속을 끌어냈지만, 정작 공기업들은 이를 활용하길 주저하고 있다. 공기업은 최우량(AAA) 신용등급을 보유하고 있어 채권을 발행하면 은행 대출보다 저금리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서다. 비용 논리상 공사채 발행은 지속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민간 기업 ‘돈 가뭄’도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형국이다.

10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달 들어 9일까지 공기업 등의 특수채 순발행액(발행액-상환액)은 8889억원으로 발행액이 상환액을 웃돌았다. 이는 다른 기업 채권과 대비된다. 은행채(2조2000억원 순상환)·기타 금융채(3290억원 순상환)·회사채(6724억원 순상환) 등은 모두 발행액이 상환액에 미달했다. 투자자를 구하지 못하거나 사업 축소로 회사채 발행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누적 적자 등으로 자금난에 처한 공기업이 고금리로 채권을 발행하면서 공기업과 민간 기업 간 ‘금리 역전’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투자자 입장에선 사실상 부도날 위험이 없는 공기업이 더 많은 수익을 약속하는데, 굳이 민간 기업 회사채에 눈을 돌릴 이유가 없다. 투플러스(1++) 등급 한우가 원플러스(1+) 등급 한우보다 더 싼 값에 나오면 원플러스 한우를 사 먹을 사람은 사라지고, 모두가 투플러스 한우에만 쏠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독 공기업 채권만 발행액이 상환액을 초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다.

지난 9일 AAA급 한국전력공사채(3년물) 금리는 5.686%로 AA-급 회사채(3년물) 금리(5.594%)보다 0.092%포인트 높다. AAA급 금리가 AA급보다 높은 금리 역전 현상은 지난 9월 26일 이후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력뿐만 아니라 인천공항(6.077%), 주택금융공사(5.659%) 등 다른 AAA급 공기업도 AA급 회사채 금리를 웃돌거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섰다.

전문가들은 자금 경색을 풀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공기업들이 시중 자금을 흡수하는 ‘AAA급 블랙홀’ 해결을 든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한전채 등 공기업 채권이 회사채를 밀어내는 현상이 해결되지 않으면, 국내 채권시장은 자금 조달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며 “자금 경색이 지속하면 주식·부동산 등 다른 시장으로도 여파가 확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한전 등 자금난에 처한 공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게 시장 경색을 푸는 데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공기업들이 자기들부터 살자고 하니 민간 기업이 다 죽게 생겼다”며 “차라리 정부가 직접 한전 자본 확충에 나서 한전채 발행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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