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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의인이 없어도 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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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정치팀 기자

박태인 정치팀 기자

의인(義人)과 영웅이 이제는 안쓰럽다. 대형 참사가 터질 때마다 등장하는 그들도 피해자가 아닐까.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의 폐해를 온전히 떠안은 개인들. 이태원 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태원 파출소의 김백겸 경사, 사고 현장서 “사람이 죽고 있어요”라며 목놓아 소리치는 모습이 찍혀 전 국민에게 알려진 경찰관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눈을 감으면 희생자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고, 유족들에겐 더 구조하지 못해 면목이 없다”며 죄책감을 토로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북받치는 감정에 오열했다. BBC와의 인터뷰에선 “유족을 생각하면 제가 고통스러운 거는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세월호의 영웅들도 아직 괴로움을 호소한다. 김 경사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다. 현장에 있던 그의 동료도 마찬가지일 테다.

정부의 윗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 있다. 개인을 넘어 체계를 갖추겠다는 이른바 시스템론이다. 참사가 터질 때마다 반복하는 말이다. 하지만 기자로서 마주했던 삶의 현장은 공문서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누군가 용기 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모두가 침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시스템보다 개인의 몫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지난달 29일 이태원 참사 당일 시민들의 구조 활동을 벌였던 김백겸 경사의 모습. [유튜브 ‘니꼬라지TV’ 캡처]

지난달 29일 이태원 참사 당일 시민들의 구조 활동을 벌였던 김백겸 경사의 모습. [유튜브 ‘니꼬라지TV’ 캡처]

시스템이 허울 좋은 회피의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 “또 다른 의인이 등장하겠지.” 다들 이런 생각이었지 싶다. 아니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MZ세대의 최대 명절로 불리며 10만여 명이 운집할 것이란 ‘이태원 핼러윈 행사’ 참사를 장관이 대통령보다 늦게 알고, 경찰청장은 지방 캠핑장에서 잠이 들어 늦게 대응하고, 용산구청장은 사전 대책회의 대신 야유회를, 참사 당일에도 고향 지역 축제를 찾은 일 말이다. 책임져야 할 이들이 외면한 자리를 156명의 희생자와 수많은 생존자의 트라우마가 대체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경찰 수사도 시작됐다. 정부는 연일 엄중 조치를 말하며 재난 대응 시스템 정비를 강조한다. 참사 대응 때와는 달리 경찰의 압수수색 속도가 전광석화다. 구조를 세우겠다며 범인을 서둘러 찾는, 결국 참사의 책임을 다시 개인에게 물으려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김 경사가 속한 이태원 파출소 역시 수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참사다. 의인과 영웅이 필요 없는, 모두가 보통의 일상을 보내는 세상이 다름 아닌 시스템이다. 구조 현장에서 희생자를 지켜본 이들은 이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김 경사는 “감내할 것”이라고 했지만, 조금씩이라도 매일 죄책감을 덜어내며 살아가길 기도한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도 피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