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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계도 ‘미투’ 바람, 한국 여성 운동에 자극 받은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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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호 27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일본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2019)’. [사진 영화사 진진]

일본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2019)’. [사진 영화사 진진]

가을은 영화 행사가 많다. 덕분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진 일본에서도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내가 최근 참여한 행사 중 하나는 파주에서 열린 ‘출판도시 영화교류 포럼’이다. 이틀에 걸친 행사로 첫날에는 ‘코로나19를 전후한 한국·일본·중국 영화 동향’이라는 주제로 한·중·일 각국 전문가들의 발표가 있었고, 둘째 날에는 일본 영화와 중국 영화를 상영했다.

일본에서는 이봉우 대표가 참여했다. 그는 현재 영화사 ‘수모모(SUMOMO)’의 대표지만 원래 영화사 ‘시네콰논’의 대표로 알려진 영화 프로듀서다.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코리안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인이기도 하다. 한국영화 ‘서편제’(1993), ‘쉬리’(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일본에서 배급하면서 일본 내 한류 붐을 만들었고, 프로듀서로서는 재일코리안을 그린 명작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 ‘박치기!’(2005)를 제작해 일본 내에서 수많은 영화상을 받았다.

이번 파주 포럼에서 상영된 일본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2008)였다. 고레에다 감독은 2018년 ‘어느 가족’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올해는 한국영화 ‘브로커’를 연출하면서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일본 감독이다.

‘세계 젠더 격차’ 한국 99위, 일본 116위

일본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 나리카와 아야]

일본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 나리카와 아야]

나는 이봉우 대표가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도 제작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고레에다 감독이 어느 정도 유명해진 후에 만든 작품이지만, 그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1995)과 주연 배우 야기라 유야가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하고 고레에다 감독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 ‘아무도 모른다’(2004)의 배급은 이봉우 대표가 맡았었다. 말하자면 고레에다 감독의 재능을 누구보다 재빨리 알았던 한 사람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걸어도 걸어도’를 뽑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렇다. 한국 영화 팬들 중에도 이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때문인 것 같다. 영화 제목 ‘걸어도 걸어도’ 역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가사의 한 대목이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본 노래 베스트 3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걸어도 걸어도’ 상영 후에는 명필름 이은 대표가 진행을 맡고, 이봉우 대표가 질문에 답하는 간담회가 이어졌다. 나도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는데, 인상에 남은 질문이 있다. 이은 대표가 물어본 “일본에서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무릎 꿇고 앉아요?”라는 질문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편해 보이는 것 같다. 실제로 일본에선 바닥에 앉을 때 남성은 책상다리로 앉기도 하지만, 여성은 무릎을 꿇고 앉는 게 보통이다.

영화에서는 며느리가 시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잠시 혼자 방에 있을 때 다리를 뻗고 쉬는 모습이 나왔다. 나 역시 ‘시부모님 앞에선 책상다리로 편하게 앉을 수 없다’고 한국 관객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속으로는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의 구조상 책상다리를 못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기모노를 입지 않는 평상복 차림에서도 왜 지금까지 여성은 편하게 앉을 수 없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일본 여성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 갇혀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이렇듯 다른 나라와의 문화 교류는 자국 문화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선 몇 년 전부터 한국 문학이 인기를 얻고 있는데 그 계기가 된 작품은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남녀 격차와 여성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어려움에 대해 자각했다는 일본 여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2018년 한국에서 미투(#MeToo) 운동이 퍼졌을 때 일본은 조용했다. 몇몇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긴 했지만 운동이라고 할 만큼 퍼지진 않았다. 이런 일본을 지켜본 한국 사람들로부터 “왜 일본에선 『82년생 김지영』은 팔리는데 미투(#MeToo)에 대해서는 조용하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나는 일본 여성들이 참고 있을 뿐, 피해는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올해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46개국 중 일본은 116위, 한국은 99위였다. 이 보고서는 경제·정치·교육·건강 4개 분야에 관한 통계 데이터로 산출되며

1위에 가까울수록 남녀 격차가 적다. 일본의 경우 경제·정치 분야가 특히 격차가 크며 국회의원이나 관리직에 여성이 적다고 지적 받고 있다.

문 열린 한·일 문화 교류 활성화 기대

8월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여성 영화-우리들의 이야기-』.[사진 나리카와 아야]

8월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여성 영화-우리들의 이야기-』.[사진 나리카와 아야]

그런데 올해 들어 일본 영화계에서도 미투(#MeToo)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유명 감독과 배우로 인한 성폭력과 성희롱이 잇따라 폭로되고 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일본 여배우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감독이 자신을 술집에 불러 “애인이 돼 달라”고 하는 걸 거절했더니 배역이 변경돼 작은 역할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여배우는 나한테는 털어놨지만 “폭로하면 앞으로 배우 인생에 지장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조용히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 영화계에서 미투(#MeToo) 바람이 부는 가운데 올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니시카와 미와, 후카다 코지 등 6명의 감독이 ‘우리는 영화감독의 입장을 이용한 모든 폭력에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속에서 그들은 “일본 영화계는 아직도 구태의연한 남성사회이며 성차별의 골이 깊다”고 지적했다.

나는 일본 내 이러한 움직임이 한국의 미투(#MeToo)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에서 내게 부탁하는 강연·원고 의뢰 중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는 것이 많아졌다. ‘한국 여성 영화’나 ‘미투(#MeToo) 이후의 한국’ 같은 것이다. 한국은 미투(#MeToo) 이후 크게 변했는데 그중 하나가 여성 감독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특히 한국 여성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 8월에 『한국 여성 영화-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책이 나왔을 정도다. 나도 올해 개봉한 영화 ‘오마주’로 주목 받고 있는 신수원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집필에 참여했다. ‘오마주’는 데뷔 10년을 넘은 신 감독 자신의 경험을 담은 동시에, 한국 영화계에서 두 번째 여성 감독이었던 홍은원 감독에 대한 영화다. 홍 감독은 지금보다 훨씬 여성이 영화계에서 일하기 어려웠던 1960년대에 감독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웃나라에서 일어난 변화의 움직임과 여성을 그린 영화·드라마·소설에 자극을 받아 일본 여성들도 조금씩 의식이 바뀌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듯하다.

한국 영화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일본 내 또 다른 움직임은 일본 감독들이 ‘일본판 CNC 설립을 요구하는 모임’을 만든 일이다. 이 또한 위의 성명을 낸 고레에다, 니시카와, 후카다를 포함한 감독들이 만든 단체다. CNC는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로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 같은 기관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프랑스와 한국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일본 영화계에 부족한 부분을 실감한 게 클 것이다. 이봉우 대표도 파주에서 일본 영화 현황을 발표할 때 일본 감독들의 움직임에 대해 “이 흐름이 어떤 실행력을 갖출 지가 일본 영화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일본은 영화에 관한 공적 지원이 약하고 중심적인 기관이 없는 게 문제다. 미투(#MeToo)가 퍼지는 가운데 한국에선 성폭력 예방 교육에 영진위가 나서는 등 공적 기관들이 대책을 마련했는데, 일본에서는 몇몇 감독들이 성명을 내는 정도인 상황은 큰 차이다. 국회의 반응이 둔한 것도 여성 의원이 적은 것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이제 출입국의 문이 열려 다시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좋은 점은 서로 적극적으로 배워가기를 바라며 나도 미력하게나마 한일 사이에 연결고리가 되고 싶다.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전 아사히신문 기자,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동국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 2020년 한국에서 에세이집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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