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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서 열리는 제주4·3 추도, 일본 식민의 역사를 되묻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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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호 27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2022년 9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의 무대. [사진 제주4.3평화재단]

2022년 9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의 무대. [사진 제주4.3평화재단]

지난달 초 세종문화회관에서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을 봤다. 1948년에 일어난 제주4.3을 소재로 한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을 원작으로 제주시(제주아트센터)와 제주4.3평화재단이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상연 후 커튼콜에는 원작자인 현기영 작가도 무대에 나왔다.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한 1978년 당시 한국은 군사정권 시대로 제주4.3은 금기시됐던 시대다. 실제로 현기영 작가는 군 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순이삼촌』은 판매 금지됐다. 사건이 일어나고 30년이 지난 당시에도 제주4.3은 공론화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제 『순이삼촌』 발표 후 반세기 가까이 지나, 오페라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됐고, 약 3000석 규모의 객석은 이틀간 만석을 기록했다. 무대에서 큰 박수를 받은 현기영 작가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나는 몇 년 전 한국 신문에 제주4.3에 대한 칼럼을 썼다가 지인한테서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사건이라 안 쓰는 것이 좋다”는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 진상규명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당시)이 공식 사과한 건 2003년인데, 정권이 바뀌면 평가가 또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수십년간 거론조차 못해

『순이삼촌』은 일본에서도 번역판이 나와서 제목은 알고 있었다. 제대로 읽은 건 작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때 ‘수프와 이데올로기’(양영희 감독)라는 제주4.3 관련 영화를 보고 나서다. 『순이삼촌』은 제주4.3 때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30년 동안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도 제주4.3을 겪고 일본에 피신한 후 가족한테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겨왔다. 양 감독은 10년 전쯤 개인적으로 어머니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4.3 때의 경험을 털어놓았고, 그것이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오랜 침묵이 어머니의 트라우마를 더 크게 만든 듯하다.

한국에선 『순이삼촌』이 4.3문학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에선 제주4.3을 다룬 소설이 그보다 훨씬 전에 출간됐다. 1957년 발표한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이다. 이 시기에 제주4.3을 다룬 소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일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석범 작가는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코리안이지만 4.3 당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통해 부모의 고향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었다고 한다. 1976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97년에 완성한 그의 대표작 『화산도』는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상과 마이니치예술상을 수상했고, 일본에서 제주4.3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순이삼촌』 일본어판도 김 작가가 번역했다.

한편 『화산도』는 2015년에 한국어판이 나왔다. 12권의 대작을 번역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내가 소속된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의 김환기 소장이다. 나는 아사히신문 기자 시절부터 제주4.3과 인연이 깊다.

김석범 작가는 만 96세인 지금도 현역으로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운 좋게 올해 여름 일본에 잠시 귀국했을 때 김 작가를 만났다. 그 날은 도쿄에서 74주년을 맞은 제주4.3 추도 강연과 콘서트가 있었고, 그 뒤풀이 행사에 김 작가가 온 것이다. 제주에서 온 지인들과도 어울려 술을 마시는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헤어질 때 인사를 했더니 힘찬 악수를 해주셨다. 행사에는 못 오고 뒤풀이만 참석한 걸 보고 이제 오래 밖에 있는 게 체력적으로 힘든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날 오후 3시부터 다른 데서 술을 마시고 뒤풀이에까지 온 것이라고 한다. 정말 놀라운 술꾼 할아버지다.

재일코리안 김석범 작가의 신간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 표지. [사진 나리카와 아야]

재일코리안 김석범 작가의 신간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 표지. [사진 나리카와 아야]

그 며칠 후 김석범 작가의 신간 『보름달 아래 붉은 바다』를 출판사에서 받았다. 세 편의 소설과 대담이 수록된 책인데 대담 중에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래 살 수 없었다” “소설을 계속 씀으로써 정신력이 강해졌다”는 김 작가의 말이 있었다. 소설을 계속 쓰게 한 원동력은 틀림없이 제주4.3이다. 그 때 그 현장에 없었다는 게 오히려 그에게 ‘써야 한다’는 사명감을 준 것이다.

제주4.3 추도 행사는 도쿄에서 매년 4월에 열리는데 올해는 코로나19 영향으로 6월에 열렸고 나도 방학이라 참가할 수 있었다. 강연에선 나카노 도시오 도쿄외국어대학 명예교수가 ‘제주4.3과 일본의 전후사(戦後史)’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나는 제주4.3에 대해 취재하면서 관련 책도 여러 권 읽었는데 이번 강연이 신선했던 건 일본 역사와 연결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카노 교수는 강연에 앞서 “제주4.3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추도 행사 때마다 여러 번 되짚어봤다”며 “이번엔 좀 더 넒은 시야에서 생각해보고 싶다”고 했다. 1948년 일어난 제주4.3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남북 분단에 이르는 전환점에 일어난 사건이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제주 도민들을 탄압하며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런데 그 일이 패전국 일본을 연합군이 통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분할될 계획이 있었으나 실제로 일본은 분할되지 않았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와 오사카는 배로 연결됐고 제주도 인구의 5명 중 1명은 일본에, 그 중 75%는 오사카에 있었을 정도였다. 오사카에서 노동자로 일한 제주도 출신자들은 그곳에서 노동 운동에 참여하며 제주4.3으로 이어지는 비판 정신을 키웠다고 나카노 교수는 설명했다. 제주4.3을 제주도에서 일어난 비극으로만 생각해왔는데 일본과 연결된 역사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됐다.

나카노 교수는 일본에서 왜 제주4.3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지 그 의미에 대해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를 되묻고, 공정한 세계의 실현을 전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냉전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주4.3을 조망하는 일은 ‘신냉전’이라고 불리는 지금이야 말로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넓은 시야에서 제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주4.3 비극 다룬 영화 10월 개봉

이번에 오페라 ‘순이삼촌’에 초대해준 사람은 매년 도쿄에서 제주4.3 사건 추도 행사를 주최해온 ‘제주도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도쿄’의 조동현 회장이다. 조 회장은 오페라를 보러 서울에 왔다가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에서 ‘재일코리안과 제주4.3’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조 회장은 아사히신문 기자 시절에 알게 된 후 지금도 귀국할 때마다 만나는 ‘술친구’지만, 이번 강연 때 처음 듣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조동현 회장은 1948년생이다. 제주4.3이 일어난 해에 제주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일본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주4.3 관련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가족이 아니라 김석범 작가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과 그의 생각에 매료된 후 추도 행사를 주최하면서 강연뿐 아니라 콘서트도 같이 하는 등 재일코리안도 일본사람도 함께 참여하는 행사로 키워왔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중단된 지 3년 만에 열린 터라 자리가 모자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장면. [사진 양영희]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장면. [사진 양영희]

세월이 흐르면서 제주4.3 경험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일이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작품은 남는다.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10월에 한국에서 개봉한다. 제주가 고향인데 북한을 지지하며 아들 세 명을 모두 북한에 보내버린 부모님을 양영희 감독은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배경에 제주4.3이라는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양 감독에 따르면 “어머니는 유언처럼 제주4.3에 대해 자세히 증언한 다음 갑자기 치매가 악화됐다”고 한다. 딸을 통해 남기려고 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다. 양 감독의 어머니는 영화의 완성을 보고 안심했는지 올해 1월 세상을 떠나셨다.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장면. [사진 양영희]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장면. [사진 양영희]

소설 『순이삼촌』이 제주4.3을 세상에 알린 지 44년이 지났지만 한국에선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아 아쉽다. 세계적인 시야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사건이며, 그 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다 깊은 역사·문화적 탐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전 아사히신문 기자.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동국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 2020년 한국에서 에세이집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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