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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 횡포에 수 만명 희생, 슬픈 역사 공유한 제주·대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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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호 19면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8〉 제주4·3과 대만2·28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3평화공원 내 4·3 행방불명자 위령비. 2003년 39만5380㎡ 부지에 4·3평화공원 기공식이 열린 뒤 2008년 평화공원기념관이 개관했다. [사진 윤태옥]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3평화공원 내 4·3 행방불명자 위령비. 2003년 39만5380㎡ 부지에 4·3평화공원 기공식이 열린 뒤 2008년 평화공원기념관이 개관했다. [사진 윤태옥]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히기 직전인 2019년 11월 나는 타이베이의 2·28기념관을 찾아갔다. 지하철 출구로 나와 기념관 건물이 보이는 순간, 입구의 큼직한 야외 조형물이 내 망막에 충격적으로 꽂혀 버렸다. 4·3JEJU! 대만의 2·28사건을 찾아왔는데 제주4·3이라니! 2·28사건(‘2·28대도살사건’, ‘2·28기의’라고도 한다)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찾아간 길이지만 그곳에서 제주4·3을 마주칠 줄이야.

2·28전시관을 둘러보고 마지막에 찾아간 제주4·3 특별전시관은 ‘아름답고 슬픈 섬’(島嶼的美麗與悲傷)이란 짧고도 강렬한 어구로 시작했다. 답사여행을 준비하면서 대만 친구에게 추천받아 읽었던 책 『대만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주완요 지음)와 같은 제목이었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기마경찰에 의해 한 아이가 다친 사고로, 2·28사건은 같은 해 2월 27일 전매국 단속원이 노점상 여성을 폭행한 사건으로 시작됐다. 제주에선 2만5000명에서 3만 명이, 대만에서는 2만8000명이 죽었다. 서로 다른 두 섬에서 너무 유사한 일이 평행선 같은 역사를 그렸다.

사건 40여년 지나서야 진상 드러나

제주 성산 터진목의 4·3 학살 터 표지와 일출봉. [사진 윤태옥]

제주 성산 터진목의 4·3 학살 터 표지와 일출봉. [사진 윤태옥]

해방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는 항복했고 제주도는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배가 끝났다. 미군은 9월 28일 제주도에 들어왔고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청에서 군정을 시작했다. 같은 날, 대만도 50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됐고, 50년 동안 접촉하지 못했던 ‘낯선 조국’ 중화민국의 군대가 진주했다. 대만은 행정장관이 삼권을 독점하고 주둔군 사령관까지 겸직했다. 군정과 다를 바 없었다.

식량 제주도는 식량이 부족했다. 1946년에는 보리마저 흉작이었다. 그 위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까지 내려졌다. 공출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일제강점기가 되살아난 듯했다. 대만도 태평양 전쟁 동안 이미 식량 생산이 대폭 줄어 있었다. 중화민국은 대만에 전매국과 무역국을 설치해 경제를 독점했다. 장뇌·성냥·담배·술·도량형 등을 전매로 묶었고, 대만 전역의 운수를 통제하며 무역과 공업을 정부가 독점하고는 민간인들을 가혹하게 단속했다. 해방 이후 1년여 만에 물가가 100배나 올랐다.

귀향 제주도에는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포함해 6만여 청장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만에도 일본군에 끌려갔던 젊은이 10만여 명 돌아왔다. 두 섬 모두 쌀독은 비어 있었고 일자리도 없었다.

제주 4·3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떠나고 남은 집터. [사진 윤태옥]

제주 4·3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떠나고 남은 집터. [사진 윤태옥]

외지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관리와 경찰을 복귀시켰다. 1947년에는 서북청년단이 대거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폭력과 횡포에 제주 사람들을 부글부글 끓었다. 대만은 고위직 21명 가운데 단 한 명, 중간관리 316명 가운데 겨우 17명만이 대만 사람이었다. 대만 사람의 급여는 같은 업무를 해도 외지인의 반이었다. 국민당 군대는 조폭 수준이었다. 걸핏하면 권총을 꺼내 들었고 강탈·공갈·협박·겁탈이 횡행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공산당 딱지를 붙이고는 끌고 가서 고문을 가했다. 관리들은 술집과 도박장에 살다시피 했다. 검찰관이나 법원장과 같은 고위직도 마찬가지였다. 대만 사람들은 ‘개가 떠나자 돼지가 왔다’며 탄식하고 분노했다.

촉발 1947년 3.1절 기념식과 시위가 이어지는 와중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밟혔다. 구경꾼들이 항의하며 쫓아가다가 느닷없는 총성에 쓰러졌다. 국민학교 6학년 어린이를 포함해 여섯 명이, 그것도 등에 총을 맞아 죽었다. 제주의 3.1사건 이틀 전, 대만 전매국 단속원이 여성 노점상 한 사람을 폭행했다. 구경꾼들이 항의하자 총을 쏴 한 사람이 죽었다. 제주도나 대만이나 인명 사건을 해결하라고 시위를 하면서 그동안 쌓인 분노가 불붙었다. 섬 전체로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악화 1947년 3월 10일 제주는 총파업을 했다. 공무원은 물론 미군정청 통역단이나 현직 경찰관도 파업에 동참했으나 열흘 정도 지속하고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파업 후 한 달 만에 제주 사람 5백여 명이 잡혀갔다. 육지에서 증파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많은 사람을 끌어다가 고문을 했다.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고문 1948년 3월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에 끌려갔던 두 청년이 고문사를 당했다. 한림에서는 초주검이 되어 끌려가던 청년이 총살을 당하는 사건도 터졌다. 세 곳에서 주민과 학생들이 장례를 치르고 분노의 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이 사건을 감찰했지만 유해진 제주지사는 유임됐다. 1948년 5·10 남한 단독선거를 밀고 가던 미군정은 유해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봉기 남로당은 탄압이 강해질수록 강경하게 저항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경찰서와 우익인사들을 공격해 경찰관 넷과 민간인 여덟 명, 무장대 둘이 사망했다. 미군정과 국방경비대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대대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협상 제주의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중령)은 미군정의 실정이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4월 28일 무장대와 전투중지를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협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일 우익 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을 불 지르자 이를 무장대들의 소행이라고 발표하고는 강경토벌에 나섰다. 김익렬은 해임됐다. 대만 행정장관은 2·28사건 직후 사건처리위원회와 수습을 논의하기는 했다. 유화 제스처로 시간을 끌면서 뒤로는 장제스에게 진압군 파병을 긴급 요청했다.

타이베이 기념관에 제주4·3 조형물

타이베이 2·28기념관 내 당시 무자비한 진압을 형상화한 작품. [사진 윤태옥]

타이베이 2·28기념관 내 당시 무자비한 진압을 형상화한 작품. [사진 윤태옥]

파병 파병이 되자 섬에는 죽음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새카맣게 덮었다. 제주 경찰은 1947년 초에 330명이었으나 3·1사건을 예상한 듯 충남북 경찰 100명이 이미 ‘응원경찰’로 제주도에 도착해 있었다. 3·1사건이 터지니 바로 목포 경찰 100명을, 보름 후에 전남북 경찰 222명을 제주도로 출동시켰다. 1948년 4·3이 터지자 전남 경찰 100여 명이 급파됐다. 5월에는 수원의 국방경비대 11연대가 제주도에 상륙했다. 서북청년단도 몰려들었다. 12월에는 서북청년단 620명이 경찰, 곧이어 새로 건너온 단원 250명은 군과 경찰로 나누어 채용됐다. 대만에서는 파병요청 3일 만에 국민당 군대 2개 사단이 들이닥쳤다.

학살 제주는 1948년 11월부터 4개월간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초토화했다.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원동리·세화리·토산리·다랑쉬굴, 조천면의 자수자, 의귀국민학교 수용 주민, 북촌·동광리·상창리·봉개지구 육해공 합동작전... 지명 하나에 적게는 50여 명이, 많게는 수백 명씩 죽어 나갔다. 사형이 집행된 것도 수백 명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8월에 제주시·서귀포·모슬포 등지에서는 예비검속자 주민이 수백 명씩 학살당했다. 대만에서는 2개 사단이 상륙하고 5월 16일까지 두 달 동안 대만 전역을 휩쓸었다. 진압이란 이름의 생지옥이었다.

방언 제주도 지방어는 외지인들에게 낯설었다. 중국의 지방어는 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식민지 50년 동안 대만은 대륙과 접촉이 없었으니 대만 말은 외국어와 다를 바 없었다. 제주도 토벌대나 대만 진압군의 말을 즉시 알아듣지 못해 죽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밀항 제주 사람들은 학살의 광풍이 멈추지 않자 제주도에서 탈출했다. 밀항도 많았다. 오사카는 제2의 제주도가 되었다. 대만은 2·28사건 이후에 많은 사람이 말없이 이민을 했다. 그것은 생존이고 도피였고 추방이었다.

침묵 대만이나 제주도나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원혼으로 떠돌았고 가족들은 연좌의 사슬에 묶여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현기영이 1979년 소설 『순이삼촌』으로 4·3을 건드리자 그의 손톱은 고문에 짓이겨졌다. 40년 동안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침묵을 강요당했다. 계엄령 치하의 대만도 그랬다. 대만의 역사를 배울 수도 없었다.

해금 1987년 4·3과 2·28은 비로소 해금됐다.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이뤘고 대만은 계엄령을 해제했다. 두 학살 사건은 어렵사리 공론화 과정을 거쳐 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과 두 나라 국가원수는 자국의 국가폭력을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지금은 기념관과 유적지 등을 통해 참극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대만2·28과 제주4·3은 쌍둥이였다. 망망대해 3000㎞ 떨어진 두 섬의 비극은 어찌 그리 똑같았을까.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 속에 깊고 깊은 슬픔을 품고 있는 섬이다.

윤태옥 답사여행객 kimyto@naver.com 지난 15년 동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2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휴전선 지역, 바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서해·남해·제주 지역을 답사했다. 올해에는 바다의 역사 해외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하면서 『변방의 인문학』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등을 펴냈다. https://blog.naver.com/kimy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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