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11번 피습 당해 숨지자, 좌우합작 물거품 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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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호 27면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7〉 ‘우리’ 끼리 테러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앞에서 해방을 만끽하는 시민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몽양 여운형의 모습을 그린 그림. [그림 수묵화 작가 유준]

194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앞에서 해방을 만끽하는 시민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몽양 여운형의 모습을 그린 그림. [그림 수묵화 작가 유준]

펜스와 정문이 1m 남짓으로 야트막해 다가서는 사람을 편하게 맞이해 준다. 더 가까이 다가서면 ‘血濃於水(혈농어수,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휘호가 눈에 들어온다. 보는 이의 마음 속에 작은 돌을 던지는 듯하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여운형의 묘소(106-1번지)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는 여운형의 생가와 기념관(623-2)이 있다. 여운형의 남겨진 생과 사의 거리는 직선으로 35㎞밖에 되진 않지만, 역사에서 그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훨씬 깊고 아픈 골짜기가 놓여있다.

여운형은 1886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학문을 공부했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솔선하여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었다. 나라가 망하자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1932년 석방된 이후 그의 족적은 조선중앙일보, 조선농구협회, 조선축구협회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일제가 패망하던 바로 그날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웠고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다가 1947년 7월 19일 테러로 사망했다. 해방 이후 그가 당한 열한 번째의 테러였다. 여운형이 당한 열한 번의 피습일지를 펼치면 1945~47년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경기도 양평에 생가와 기념관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1946년 3월 20일 미국 대표단과 함께 한 여운형(오른쪽). [사진 윤태옥·몽양기념관]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1946년 3월 20일 미국 대표단과 함께 한 여운형(오른쪽). [사진 윤태옥·몽양기념관]

일제가 패망한 그해 8월 15일부터 미군이 중앙청에 성조기를 게양한 9월 9일까지의 26일간은 식민지에서 점령지로 운명이 바뀐 조선에겐 절체절명의 기회였다. 길윤형(한겨레신문 국제부장)은 이 시기를 집중적으로 분석해 『26일 동안의 광복』을 펴냈다. 그는 “당대를 살았던 이들은 자신의 양심과 손익 계산에 따라 최선의 판단을 내렸지만, 결과는 끔찍한 파국”이라고 탄식했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자 조선총독부는 중도좌파인 여운형과 우파인 송진우에게 각각 치안협조를 요청했다. 송진우는 거절했다. 여운형은 중도우파인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8월 15일 당일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은 그날 합작을 위해 송진우를 두 번 만났고 16일 우파의 이인이 여운형을 찾아 다시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이런 와중에 18일 오전 1시경 여운형은 1차 테러를 당해 시골로 요양을 가야 했다. 일제의 탄압이 멈추자 ‘우리 사이의 테러’가 시작된 것이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우파 영입방안을 강구했다. 그러나 건준의 좌파, 특히 박헌영의 재건파가 강하게 반발하는 와중에 8월 24일 미군이 38선 이남을 접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계기로 좌파에 눌리고 밀리던 우파는 건준을 향해 거친 반격을 시작했다. 9월 4일 건준에서의 좌우합작은 실패로 끝났다. 좌파는 미군 진주에 대처하여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헌법 초안도 없었고 공중의 합의 절차나 과정도 없다시피 했다. 미군은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고 오후 4시 조선총독부의 항복문서를 접수했다.

건준이 좌우합작의 단일한 정치조직으로서 미국과 소련을 상대했었어도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치달았을까. 안재홍은 당시를 회고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좌우 쌍방이 국제정세에 너무 우원(愚遠)했고 사대주의적이었다”고. 이런 순간에 9월 7일 저녁 여운형은 두 번째 피습을 당했다. 운 좋게 행인들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임시정부는 11월 23일 뒤늦게 귀국했다. 김구는 미군에게 정부나 정치기구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굴욕적인 각서를 써야 했다. 임정이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운형은 세 번째 피습을 당했다. 12월 초 휴양 차 들른 황해도 연백의 한 여관에 괴한이 침입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열흘 동안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신탁통치 5년 방안이 알려지자 조선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우파는 좌파에게 찬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정국은 요동쳤다. 그런 와중에 1946년 1월 여운형에게 네 번째 테러가 시도됐으나 출타 중이라 모면했다.

미국은 1946년 2월 우익 인사 중심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설치했다. 미국은 여운형을 초치했으나 그는 불참했다. 오히려 그에 맞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단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백남운)을 결성했다. 민주의원과 민전으로 대립하면서 좌우갈등 구도가 더 깊어졌다.

3월 말 서울에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합의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미국은 “일차 목표는 소련의 한국 지배를 막는 것이고, 수년 내로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소련 역시 친소정부 수립이 확고한 목표였다. 3월 15일에 이미 임시정부 각료 명단까지 훈령으로 내려보냈다. 수상 여운형, 부수상 김규식·박헌영….

미군정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터뜨려 당시 최대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 민전도 지하로 들어갔다. 민전 공동의장 여운형은 더욱 거칠어진 정국 속에 북으로 가서 조만식·김일성 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했다. 이후 다섯 차례 방북하여 어떻게든 좌우-남북 합작을 이루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1946년 4월 18일 청계천 관수교 위에서 괴한들에게 또 습격을 당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외치고 나왔다. 여운형은 5월 25일 중도우파 김규식과 우파 원세훈과 함께 좌우합작을 위한 회동을 가졌다. 그런데 5월 하순 밤 10시경 종로에서 여섯 번째 습격을 당했다. 격투가 벌어졌고 행인들이 구출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허헌·김원봉과 회동하며 좌우합작의 외연을 넓혀가던 중 7월 17일 일곱 번째 테러를 당했다. 이번에는 괴한들이 신당동 야산으로 납치했으나 벼랑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미군정 경무부는 암살 미수범 3명을 체포했으나 이들의 처리는 오리무중이었다.

여운형은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파에서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 좌파에서 성주식·정노식·이강국이 참여했다. 여운형은 양측을 중재하여 좌우합작 7원칙을 10월 7일 발표했으나 이날 여덟 번째 테러를 당했다. 자택의 문 앞에서 4명에게 납치돼 2일간 감금되었다가 스스로 결박을 풀고 탈출했다. 여운형을 향한 테러는 영화라는 픽션보다 독했다.

중국서 독립운동, 투옥되기도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여운형 묘소. [사진 윤태옥·몽양기념관]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여운형 묘소. [사진 윤태옥·몽양기념관]

1947년이 됐다. 3월 17일 여운형의 자택 침실이 폭파됐으나 무사했다. 5월 12일 저녁 혜화동에서 그가 타고 있던 자동차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범인은 체포되었으나 처리는 또다시 흐지부지됐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20일 서울에서 열렸다. 7월까지 협의단체에 반탁 단체를 넣느냐 마느냐로 허무한 입씨름만 질리도록 했다. 미소건 남북이건 좌우건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점령국의 정책이 그러했으니 합의될 리가 없었다.

여운형에게 운명의 날이 닥쳤다.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의 파괴만이 민족의 살길 또는 자신들의 생존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을 누군가가 열한 번째 테러를 가했다. 여운형은 숨을 거두었다. 9월 17일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끈질긴 테러에도 질기게 살아나곤 했지만 결국 그렇게 죽었다. 좌우합작도 죽었다.

내부가 단합해야 외부적인 분단압력에 그나마 버텨봤을 것이나 내부가 이리도 심하게 대립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통합의 대국적 정치를 해보지 못한 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에서도 그랬다. 국내외 민족유일당 운동도 실패했다. 신간회 해체는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임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열하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1944년 목숨 걸고 일본군에서 탈영하여 임정을 찾아간 장준하는 “다시 일본 항공대가 되어 임정 청사를 폭격하겠다”며 절규했을까.

항일투쟁을 피로 물들이며 조선의 좌파는 선명성과 조직력이 몸에 배었다. 그러나 좌파의 진짜 조직력은 우파를 끌어당겨 품는 것이어야 했다. 우파는 지식과 교양과 재산이 있었으나 투쟁을 우회하거나 아예 친일로 붙어 버렸다. 우파의 진짜 목소리는 기득권을 절제하면서 공감대를 확장하는 것이어야 했다. 좌파는 우파의 친일을 공격했다. 우파는 좌파를 빨갱이라고 공격했다. 통합의 구심력이 아니라 대결의 원심력만 진저리치듯 쏟아냈다.

여운형을 누가 죽였는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죽였다. 일본도 미국도 소련도 아닌, 바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였다. 여운형의 묘소 정문에 장식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다시 쳐다본다. 여운형의 죽음은 피가 물보다 진하지 않았다는 당시의 역사를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그래도 나는, 멈칫멈칫하면서도 그의 말에 공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최소한 수백만이 죽어 나가는 공멸에 빠지지 않을 만큼은 진해야 했지 않았을까.

윤태옥 답사여행객 kimyto@naver.com 지난 15년 동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2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휴전선 지역, 바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서해·남해·제주 지역을 답사했다. 올해에는 바다의 역사 해외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하면서 『변방의 인문학』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등을 펴냈다. https://blog.naver.com/kimy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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