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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복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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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팀 기자

박형수 국제팀 기자

프로 바둑 기사들은 대국을 끝낸 직후, 전체 대국 내용을 순서대로 되짚는 복기(復棋)를 한다. 복기에 임하는 패자는 자신이 둔 악수(惡手)를 되짚으며 실수와 오판의 순간들을 직면한다. ‘바둑의 전설’ 조훈현 9단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자신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패전 후 복기의 고통을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바둑의 세계에서 복기를 회피하면 실력을 키울 수 없다. 복기를 게을리하는 하수들은 자신의 패착을 매번 반복해, 패배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돌부처’ 이창호 9단은 『부득탐승』에서 “복기는 패자에게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지만, 유일하게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시간”이라 설명했다. 또 “패한 대국을 다시 놓아보며 실패의 원인을 찾는 복기의 노력만큼은 누구보다 많이 했다”고 자부했다.

복기가 주는 교훈은 자신의 실수와 실패 경험이 전진과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데 있다. 내 안에 숨은 오판과 악수의 패턴을 찾아내 제거하고, 묘수와 승착의 전략을 새로 심는 게 복기의 수순이다.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핼러윈데이를 즐기러 나온 청춘 156명이 압사하는 날벼락 같은 참사가 터졌다. 대통령은 즉각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문화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되는 등 전 국민이 추모에 동참하고 있다. 112 신고에 대한 경찰의 부실한 대응, “경찰·소방인력 배치 부족이 참사 원인 아니다”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 등은 이번 참사가 “관리 실패로 인한 인재”였음을 확인하게 한다.

추모와 함께 지금 할 일은 차분한 복기다. 이 같은 관리 실패가 왜 발생했는지 꼼꼼하게 되짚으며, 당시의 오판과 악수의 원인을 빠짐없이 분석해야 한다. “통제해 달라”는 112 신고를 가벼이 넘긴 원인 중 혹시라도 “노는 것까지 지켜줘야 하느냐”는 식의 부정적 인식이 깔려있진 않았는지, “왜 그런 델 갔냐”는 조롱 댓글은 왜 등장하는지까지도 빈틈없이 살폈으면 한다.

치밀한 복기 뒤에 책임자 문책도, 새로운 안전관리대책 마련도 진행될 수 있다. 제2, 제3의 참사를 막을 묘수는 이번 이태원 참사에 숨어있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부실, 치부를 제대로 헤집는 데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