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곡수매」에 합리적 접근을(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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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추곡수매가 및 수매량의 결정이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농민들의 집단시위,과격행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벼 가마를 태우는 사태는 쌀 한 톨,밥알 한 알이라도 소홀히 하는 것을 죄악시 하는 농민들의 의식과 윤리관에 견주어 볼 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매년 가을에 추곡수매를 둘러산 정부와 농민간의 줄다리기는 연례 행사처럼 있어 온 일이고 이번 일련의 사태도 그같은 범주를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대범하게 보아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농민들이 이번처럼 전국에 걸쳐 동시 다발적으로 집단시위나수매거부 움직임을 보이고 벼를 소각하는 과격행동으로 나아간 것은 처음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가 요즘 사태를 걱정스럽게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민들이 수매정책 결정을 앞두고 과격행동으로 나오게 된 직접원인은 물론 수매가ㆍ수매량 결정이 늦어지고 있는데다 그 내용도 기대에 못미치리라는 예상 때문이다.
정부의 수매계획은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고 정부안이 확정되더라도 다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절차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올해 수매가 인상률을 한자리 수로 억제하고 수매량도 대폭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동안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입안자들이 수차 밝힌 바 있고 이것이 농민들의 요구와 적지 않은 거리가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농민들의 움직임은 그 때문만이 아니고 우루과이라운드 출범에 대한 불안과 이에 대한 정부의 무책에 대한 불신감,그리고 당리당략에 휘말려 농촌문제를 뒷전으로 돌리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불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추곡수매가 인상률이나 수매물량의 결정이 농민들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쌀의 과잉생산으로 늘어나는 재고미,이에 따른 재정부담의 가중,물가파급 영향 등 제약요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농민들이 정부나 정치권의 작태에 실망과 분노를 표시하는 데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추곡수매가 시작되고도 보름이 가깝도록 정부방침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소극적 자세나 농민문제라면 언제나 앞장서는 시늉을 하던 정치권이 수매가 결정 등 주요현안을 외면한 채 국회를 파행으로 방치하는 현실 등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농민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장의 수매가 결정도 못해 놓고 있는 당국자들이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이중곡가제 폐지논의부터 들고 나오고 있는 것은 가뜩이나 우루과이라운드 출범 등으로 불안을 느끼는 농민들을 더욱 자극할 것은 분명하다. 그같은 제도 변혁이 앞으로 필요하다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지나치게 무신경하고 무책임한 언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농업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정부는 외면과 기피,혹은 독단과 졸속을 피하고 농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어려운 사정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그들의 요구를 가능한 한 받아 들이는 성의를 보이는 바탕 위에서 정책을 입안,추진해야 하리라고 본다.
동시에 농민들도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거나 이를 과격한 행동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전체 국가경제의 발전과 국제화시대의 흐름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인식 위에서 농업이 설 자리를 찾으려는 실용주의 입장에서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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