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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스포츠 예능의 진심전력과 피땀눈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퍼즐] 노가영의 요즘 콘텐트 썰(4) 

시청률 대박의 시대가 끝났다. 한 달 만에 유튜브 누적 조회수 2억뷰를 넘기며 K댄스 신드롬을 일으켰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TV 최고 시청률이 고작 2.9%였으니 말이다. 플랫폼 과잉으로 인한 분산 효과일 테지만, 지금은 콘텐트도 옹기종기 커뮤니티로 뭉쳐진 팬덤층이 이끌며 ‘롱런’을 만들어가는 취향 파편화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낚시 채널도 아닌데, 낚시 예능이 나오네?’ ‘도시어부’가 채널A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대중의 반응이었다. 통상 낚시는 마니아적인 취미활동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덕화, 이경규 등 연예계 소문난 낚시광의 우여곡절과 취향 진심이 흥행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덕업일치 방송이다. 현재 시즌4까지 이어지며 채널A의 대표 콘텐트로 자리 잡았다.

‘골때리는 그녀들’ 포스터. 대한축구협회 제공=연합뉴스

‘골때리는 그녀들’ 포스터. 대한축구협회 제공=연합뉴스

취미에서 한발 더 나아간 스포츠 예능의 인기도 여전하다. 물론 대표주자는 ‘골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과 ‘최강야구’다. ‘골때녀’를 먼저 엿보자. 흔히 ‘세상에서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군대와 축구 얘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온몸이 아니라 온 정신을 바쳐 축구공을 향해 달리고 넘어지고 깨지는 그녀들의 진심을 보고 있다. 게다가 52살의 박선영과 20살의 서기는 ‘진짜 스포츠’에서는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나이 차이로 ‘예능’에서만 가능한 리얼 판타지를 보여준다. 대중은 또 이 지점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메시지에 반응한다.

진심전력(盡心專力), 마음을 다해 온 힘을 쏟다 
‘최강야구’는 어떠한가. 누가 뭐래도 ‘최강야구’의 멤버들은 소위 레전드급이라 불리는 선수들이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가대표 출신들이며, 전성기 시절 최소 연봉으로 수십억원은 가뿐히 번 선수들이다. 멤버들이 JTBC 예능 ‘아는형님’의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심수창 선수(이하, ‘선수’ 생략)는 ‘나만 빼고 모두 현역 때 100억원 이상씩을 번 선수들’이라며 좌중을 웃기지 않았는가. 심지어 김선우와 송승준은 메이저리그 출신이다.

JTBC 야구예능 '최강야구'에서 득점을 올린 이승엽 감독 겸 선수가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JTBC]

JTBC 야구예능 '최강야구'에서 득점을 올린 이승엽 감독 겸 선수가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JTBC]

그 레전드급의 선수들이 아들뻘쯤 되는 고교팀과의 경기에서 단 1점이라도 더 내려 도루를 하고 성을 내면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다. 우리는 글러브 없이 맨손으로 볼을 잡아 던지는 정근우의 왼손 캐치와 텅 빈 경기장에서 입스(심리적 불안증세)에 빠진 이홍구를 연습시키는 선배 송승준의 모습에서, 마흔다섯의 박용택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타구를 전력질주로 잡아 담장에 부딪히는 장면에서 말 그대로 은퇴한 아재들의 진심전력을 본다. 그들이 ‘최강야구’에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나… 야구 좋아하는구나’이고,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은퇴한 저들이 야구에 설레는구나’이다. 이승엽 감독이 아픈 서동욱을 대신해 순식간에 헬멧을 챙겨 출전한 장면에는 ‘대주자 이승엽?…이거 실화냐’라는 웃픈 자막이 달렸는데, 마운드도 덕아웃도 중계실에 있는 그들 모두의 뭉클함이 시청자에게 오롯이 전달되었다.

벌써 십여년이 지난 방송이지만 MBC ‘무한도전’의 ‘한일 여자복서’ 편은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WBC세계 챔피언인 한국의 최현미와 이에 도전하는 일본의 쓰바샤가 사력을 다해 싸운 경기였다. 여자 권투선수들 간의 친선 경기인 줄 알았던 시청자들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혼신을 다한 그녀들의 집념과 부서지는 체력 그리고 부어터진 눈을 지켜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한도전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10라운드에 다다를수록 유재석을 비롯해 노홍철, 정형돈, 길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예능끼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경기는 최현미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진심전력을 다한 두 선수 모두 승자였다. 지금에야 다양한 장르가 결합하는 컨버전스 예능이 흔하지만, 당시의 커뮤니티 댓글에는 김태호PD가 한국 예능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글이 넘쳤다.

최고 시청률 14%를 찍는 등 일 년이 넘도록 높은 시청률을 유지 중인 ‘골때녀’도 위기가 있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편집 조작 사건이다. 지난해 12월 제작진이 일부 경기의 득점 순서를 조작하면서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시청자들의 포인트는 결국 ‘선수들은 진심전력을 다하는데 왜 예능으로 장난쳐?’이다. 제작진의 사과문 또한 ‘선수 및 감독님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편집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였다.

지상파, 종편, OTT와 유튜브까지 스포츠 예능이 남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성공한 스포츠 예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진심 전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진심전력(盡心專力), 마음을 다하여 온 힘을 쏟다’. 대중은 그 진심 전력을 원한다.

예능의 즉자성, 패관문학적 기질을 드러내다

대중 콘텐트가 사회를 투영하며 민심을 반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회가 갖고 있는 무의식적인 문제를 담기 마련이란 뜻이다. 그 근간이 창의성이라는 관점에서는 구전설화에 윤색을 더한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진 패관문학이 떠오른다. 저자 미상도 많지만 대부분 민중이 만들어 낸 패관문학은 서민들의 생활에 시대적 결핍과 사회구조적 문제 등을 업은 채 한국 고대소설의 전신이 되었다. 하나의 대중 콘텐트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필요한 자본과 소요시간 같은 현실성을 고려하면, 영화나 드라마보다 시대를 즉자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오히려 예능일지 모르겠다. 예능은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패관문학적 기질을 내포한다는 뜻이다.

스포츠 예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왜 지금 우리는 예능 안에서까지 진심 전력을 원하는가. 문화 콘텐트는 늘 사회적 결핍을 대체해왔다. 동시에 세상을 반영하고 진보시키며 치유하려 한다. 연애 예능이 연애 안 하는 사회와 젠더 갈등을 품었고, 2010년대 초중반 인구 증가율이 급감하던 시절에는 반대급부로 육아 예능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스포츠 예능은 서른살 차이에 가까운 선수를 같은 팀 또는 서로 다른 팀에 배치하며 세대 간의 갈등을 우정과 스포츠맨십으로 끌어안고 있다. 사족으로 지금의 세대 갈등은 1960~1990년대 경제 급성장으로 확연히 다른 국민소득의 시절에 출생하면서 발생한 세대 차이와는 엄연히 다르다. 그 시절이 세대 ‘차이’였다면 지금은 세대 ‘갈등’이다.

스포츠 예능이 진심전력을 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반추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곱씹어본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심전력을 안 하는 곳은 어디인가. 지금 스포츠 예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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