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68) 전 국가안보실장이 2020년 9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직후 열린 청와대 관계장관회의에서 회의록을 남기지 않겠다며 담당 비서관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해당 회의 직후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이 피격 전후 상황이 담긴 첩보 보고서 등을 삭제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당시 정부가 북한군의 공무원 사살 및 시신 소각과 관련된 군사 기밀을 무단 삭제하고, '자진 월북'으로 발표한 배경에 서 전 실장이 회의를 주재하며 "보안을 유지하라"고 지시한 점이 결정적이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서훈 지시로 관계장관회의 회의록 안 남겼다"…새벽 새 군사첩보 대거 삭제
26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이희동)는 최근 문재인정부 청와대 안보실 A 비서관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A 비서관은 "서훈 실장이 '회의 결과를 남기지 않을 거라 참석할 필요 없다'고 지시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자국민 피격 사건 직후 열린 회의에서 서 전 실장이 직접 '회의록 없음'을 결정했다는 진술이 나온 것이다. 국가안보 관련 안보실 주재 회의는 통상 A 비서관이 참석자 발언, 회의 결과 등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A 비서관 참석이 배제된 관계장관회의는 청와대 안보실이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가 북한군에 사살된 뒤 시신마저 소각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정부 차원의 첫 대응 조치였다. 감사원 감사 자료에 따르면, 서 전 실장은 9월 22일 저녁 10시쯤 이씨의 사망 사실을 알았고, 3시간 뒤인 이튿날 새벽 1시부터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했다. 서 전 실장은 이 자리에서 서욱 전 국방부 장관 등 참석자들에게 "보안 유지"를 수차례 강조했고, 이후 새벽 시간 동안 국방부가 밈스(MIMS·군사정보체계)에서 관련 군사기밀 60건을 무단 삭제했고, 국정원도 첩보 보고서 46건을 지운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서 전 실장이 '이대준씨 피살·소각 및 월북과 배치되는 증거 삭제'를 지시한 주체라고 파악하고 있다. 서 전 국방부 장관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도 22일 구속된 이후 그간의 태도를 바꿔 서 전 실장을 '월북 조작 의혹'의 주체로 지목했다. 검찰은 두 사람으로부터 "서훈 실장이 회의에서 '보안유지'를 강조했고, '월북이 맞다'는 뜻으로 알아 들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했다.
서 전 장관은 "서훈 실장의 지시를 받고 군에 보안유지 지침을 하달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서 전 실장의 지시를 '월북' 발표를 위해 불리한 증거 삭제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김 전 청장 역시 "서 실장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해경도 국방부의 월북 발표를 참고해 발표하라'고 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이후 국방부와 해경은 일부 실무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진 월북으로 추정된다'는 발표를 통해 이씨를 월북자로 몰아갔다.
서 전 실장이 이례적으로 회의록을 남기지 않은 것도 향후 법적 문제가 불거질 것을 대비했거나 월북 결론을 위해 불리한 증거를 미리 정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 전 실장은 9월 23일 오전 8시에 열린 2차 관계장관회의 회의록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2차 회의에서 서욱 전 국방부 장관에 “월북이란 초도 판단에 기초해 종합분석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검찰은 박지원 당시 국정원장과 소환조사 시기를 조율 중이다. 박 전 원장 조사 이후 서 전 실장을 조사할 계획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 여부도 서 전 실장 조사 결과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서 전 실장과 박 전 원장은 27일 국회에서 관련 혐의를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