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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러시아도, 파시스트도 거부"…여자 무솔리니 변신의 노림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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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신임 총리가 지난 23일(현지시간) 로마의 총리 관저에서 마리오 드라기 퇴임 총리로부터 내각 이양의 의미를 담은 종을 받아 들고 미소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신임 총리가 지난 23일(현지시간) 로마의 총리 관저에서 마리오 드라기 퇴임 총리로부터 내각 이양의 의미를 담은 종을 받아 들고 미소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르자 멜로니(45) 이탈리아 신임 총리가 25일(현지시간) 취임 후 가진 첫 국정연설을 통해 자신을 향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주력했다. 러시아의 ‘가스 무기화’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으며, 파시즘에 대해 동정하거나 친밀감을 느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여자 무솔리니’,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불려온 멜로니 총리는 반(反) 유럽연합(EU) 성향과 함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호적이고 파시즘을 옹호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지난 22일 취임한 멜로니 총리는 이날 하원 신임 투표를 앞두고 첫 국정 연설을 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에 대한 서방의 제재를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멜로니 총리는 “푸틴의 에너지 협박에 굴복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며 “그것은 더 많은 요구와 협박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줘 사태가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EU 규칙을 존중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멜로니 총리는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받았다. 멜로니와의 연정에 참여한 정당인 ‘전진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대표와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가 강한 친러 성향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멜로니 총리는 연설을 통해 이런 가능성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25일(현지시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내각 신임안 투표가 진행되기 전 하원에서 취임 후 첫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5일(현지시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내각 신임안 투표가 진행되기 전 하원에서 취임 후 첫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탈리아에선 멜로니 총리의 취임으로 파시즘이 부활할 거란 우려가 제기돼 왔다. 그가 이끄는 이탈리아형제들(FDI)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세력에 뿌리를 둔 정당이라서다.

하지만 멜로니 총리는 이에 대해 선을 그었다. 그는 “난 파시즘을 포함해 반민주적인 정권에 대해 한 번도 동정이나 친밀감을 느낀 적이 없다”며 “같은 방식으로 나는 1938년 (반유대주의적) 인종법을 이탈리아가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순간으로 여긴다. 우리 국민을 영원히 얼룩지게 한 수치”라고 말했다.

국정연설 전부터 멜로니 총리는 서방의 우려와 정반대 행동을 보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멜로니는 지난 23일 공식 취임한 지 몇 시간 만에 친(親)EU 주의자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비공식 정상회담을 가지며 베를루스코니와 살비니 등 극우 연정 파트너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했다.

새 정부 재무장관과 외무장관엔 친EU 인사를 임명했다. 잔카를로 조르제티 재무장관은 친EU 정책을 추진한 전임 마리오 드라기 총리 내각에서 경재개발부 장관을 지냈다. 안토니오 타야니 외무장관은 유럽의회 의장 출신이다.

지난 21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당 대표(가운데)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진이탈리아 대표(맨 왼쪽), 마테오 살비니 동맹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1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당 대표(가운데)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진이탈리아 대표(맨 왼쪽), 마테오 살비니 동맹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멜로니 총리의 행동엔 전략적 목적이 담겨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탈리아 유권자의 다수는 유럽 통합을 지지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멜로니로선 친러 성향보다는 EU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낫다는 관측이다. 멜로니는 총선 선거운동에서 줄곧 EU와 협력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실적 이유도 있다. 이탈리아는 2026년까지 1915억 유로(약 264조원)에 이르는 코로나19 회복기금을 EU로부터 지원받는다. 드라기 총리가 재임 기간 700억 유로를 지원받은 상황에서 나머지 기금을 차질없이 받으려면 EU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멜로니 총리는 국정연설에서도 “코로나19 회복기금 활용을 위해 EU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멜로니의 행보를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멜로니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EU 제도를 고치겠다며 EU와 잠재적 전선을 형성했다”며 “(멜로니가) 극우가 아닌 보수 노선에 충실할지는 더 봐야 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멜로니는 “최근 유럽중앙은행(ECB)의 금리 인상은 성급했다”며 “이탈리아는 창립 멤버로서 EU 내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입장이 변할 수 있다. 최근 FDI 고위 인사는 이탈리아 매체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경제위기 상황에 전쟁이 장기화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친밀감이 약화할 수 있으며, 연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가 심화하면 노선 변화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멜로니 총리는 “지중해 너머에서 몰려오는 불법 이민자들의 물결을 차단할 것”이라며 반이민 정책을 예고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EU가 이탈리아를 몰아붙인다면 멜로니는 언제든 극우 포퓰리즘이란 안전지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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