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치매노인이 친일파 처단...절묘한 타이밍에 개봉하는 '리멤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리멤버'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80대 노인 필주(이성민)가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친일파를 처단해나가는 복수극이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리멤버'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80대 노인 필주(이성민)가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친일파를 처단해나가는 복수극이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자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나라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조선의 철도와 항만을 건설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도 근대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말이다. 실제 어느 정치인 또는 학자가 한 말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발언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는 영화 속 대사다. 26일 개봉하는 영화 ‘리멤버’는 이처럼 전형적인 식민사관 논리를 펴는 친일파 인사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이들을 치매 걸린 노인이 차례로 처단해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복수극이다.

전작이자 감독 데뷔작 ‘검사외전’(2016)에서 검사와 사기꾼의 의기투합을 그렸던 이일형 감독은 ‘리멤버’에서는 가족을 죽인 친일파를 처단하는 노인과 그를 돕는 청년의 이야기로 눈을 돌렸다. 뇌종양 말기에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80대 필주(이성민)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60여년간 계획한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

필주와 패밀리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며 절친이 된 20대 인규(남주혁)는 운전을 도와주러 따라 나섰다가 의도치 않게 그의 복수에 가담하게 되고, 두 사람이 아슬아슬한 동행을 이어가게 된다는 게 영화의 기본 구조다.

영화 '리멤버'의 주인공 필주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가운데, 60여년 간 계획한 친일 부역자들을 향한 복수를 대담하게 실행해 나간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리멤버'의 주인공 필주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가운데, 60여년 간 계획한 친일 부역자들을 향한 복수를 대담하게 실행해 나간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필주의 복수극에 의도치 않게 휘말리게 된 20대 청년 인규(남주혁)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으나 필주의 복수가 친일파를 향한 것임을 깨닫고 생각이 바뀌는 인물이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필주의 복수극에 의도치 않게 휘말리게 된 20대 청년 인규(남주혁)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으나 필주의 복수가 친일파를 향한 것임을 깨닫고 생각이 바뀌는 인물이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기존 작품들이 민족의 아픈 역사에 주로 초점을 맞췄다면, ‘리멤버’는 개인의 복수를 통해 카타르시스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별점이다. 특히 최근 모 정치인의 발언이 불러일으킨 ‘식민사관 망언’ 논란에서 보듯, 일제강점기와 친일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제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비교적 손쉽게 관객의 몰입감을 확보하고 들어간다.

영화가 본의 아니게 시의적절해진 데 대해 이일형 감독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요즘 이럴 줄 알고 개봉한 거냐’고 묻는 분도 계셨는데, 제가 대본을 처음 쓴 건 2018년이었다. 2022년이 돼서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들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왜 옳고 그름에 대해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영화를 통해 전하려 한 메시지를 설명했다.

영화 '리멤버'는 80대 노인 필주(이성민)와 20대 청년 인규(남주혁)의 친분과 우애가 빛나는 버디무비이기도 하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리멤버'는 80대 노인 필주(이성민)와 20대 청년 인규(남주혁)의 친분과 우애가 빛나는 버디무비이기도 하다.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유대인 노인이 가해자를 처단하는 캐나다·독일 합작 영화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2015)를 원작으로 하는 ‘리멤버’는 ‘치매 걸린 노인의 복수’라는 원작의 기본 뼈대는 가져오되, 전체적인 톤과 설정은 한국에 맞게 크게 바꿨다.

가장 큰 차이점은 비교적 건조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원작에 비해 ‘리멤버’는 카체이싱 등의 액션이 가미된 상업영화로 장르가 달라진 부분이다. 복수의 주체도, 대상도 모두 80대 노인이라는 점에서 액션신의 호흡이 느려질 수도 있었지만, 감독은 필주와 인규가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도록 설정함으로써 영화 곳곳에 역동적인 사운드와 속도감을 부여했다.

영화 '리멤버' 보도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리멤버' 보도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한국판의 주요 인물인 인규도 원작에는 없던 캐릭터다. 필주의 범행에 당황하다가도 그 배경을 깨달으며 차츰 생각이 바뀌는 20대 청년 인규를 통해 영화는 80대 당사자의 입장에 더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시각을 추가했다. 세월이 지나도 일제강점기, 친일파 문제는 젊은 세대가 기억해야 할, 끝나지 않은 문제임을 강조하려 한 감독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필주와 인규의 세대를 뛰어넘은 우애는 버디 무비로서의 재미도 선사한다. 하루 3~4시간 걸리는 특수분장까지 감수하며 80대 노인을 구현해낸 배우 이성민의 실망시키지 않는 연기력도 영화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60여년을 기다린 것치고는 허술한 필주의 계획이나 후반부 반전을 노리느라 느려진 전개는 영화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원작에서 핵심적인 장치로 활용되는 주인공의 알츠하이머 설정도 ‘리멤버’에서는 다소 편의적으로 사용돼 아쉬움을 남긴다. 관객에 따라서 영화가 교조적이거나, 지나치게 메시지를 주입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불호 포인트로 꼽힌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지난 12일 언론 시사회에서 “‘(친일파를)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는 맥락 보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필주라는 인물을 통해, 또는 장르적 특성을 이용해 다뤄보고 싶었다”며 “필주의 사적 복수마저도 옳은 것으로 봐야 하는가 등 다양한 고민을 담아낸 결과물”이라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