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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여론전쟁 중…한국도 24시간 영어뉴스 채널 열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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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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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지난 19일 경남 창원의 한화디펜스에서 열린 ‘K9 자주포 폴란드 수출 출고식’은 주빈인 리우시 브와슈차크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 없이 진행됐다. 중국이 폴란드 부총리가 탄 비행기의 영공 통과를 거부하면서 방한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브와슈차크 부총리는 19일 화상으로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회담할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BBC·CNN 등 영향력이 큰 ‘대물 미디어’가 한국과 폴란드의 국익과 관련 있는 이 사건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영어로 보도해 이슈화할 수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라 이 사건은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 수준의 대한민국이 미디어의 글로벌 영향력에선 여전히 ‘변방’ 신세임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국제뉴스 측면에선 여전히 변방 신세

사실 한 국가의 ‘미디어 파워’는 정부의 외교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예로 들어 지난 8월 16일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해 발효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한국과 유럽산 전기자동차에 대한 차별 대우로 반발을 샀다. 하지만 한국 입장을 앞장서서 미국의 입법자와 유권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영어뉴스는 보기 쉽지 않다.

미디어 외교력 비중 갈수록 커져
한국도 주요 이슈 적극 홍보해야
중동 목소리 실은 알자지라 안착
우크라 전쟁서도 미디어 큰 변수

카타르 수도 도하에 있는 글로벌 24시간 다국어 방송인 알자지라의 본부에 위치한 영어뉴스 채널 스튜디오의 모습. [사진 게티이미지]

카타르 수도 도하에 있는 글로벌 24시간 다국어 방송인 알자지라의 본부에 위치한 영어뉴스 채널 스튜디오의 모습. [사진 게티이미지]

정부와 업계에서 미국에 사절을 보내는 등 여러 채널을 통해 시정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립서비스만 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지난 24일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우리는 법에 적힌 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싸늘한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한국과 유럽 측의 우려에 대해 많이 들었고 우리는 분명히 이를 고려할 것”이라는 옐런의 공허한 수사는 화만 돋울 뿐이다.

한국이 글로벌 사회에 영향력이 큰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을 운영했다면 어땠을까. 한국의 피해와 불만이 장기적으로 한·미 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한국인의 목소리가 미 행정부는 물론 의회와 대중에 직접 전달됐다면 상황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은 공영이든 민영이든 한 국가와 사회의 미디어 외교력이 될 수 있다. 때론 정부가 내놓고 말하기 껄끄러운 사안을 대놓고 다룰 수도 있다. 예로 토요일인 지난 22일 독일 베를린에선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이란 히잡시위를 지지하는 거대한 대중집회가 열렸으며, 독일의 공영 DW(독일의 소리)와 프랑스 리용에 본부를 둔 민영 24시간 뉴스 채널인유로뉴스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디어가 인간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가치외교’에 나선 셈이다. 유럽 각국 정부는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근 상황에서 산유국 이란과의 핵협상(JCPOA)을 앞에 두고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자유로운 미디어는 가치 옹호가 임무이기 때문이다.

2006년 11월 24시간 영어 채널을 개국한 카타르의 다국어 채널 알자지라 방송은 중동 시각의 글로벌 보도를 선도하면서 카타르와 중동의 ‘소프트파워’가 됐다. 프랑스도 같은 해 12월 영어 등 다국어 채널 프랑스24를 개국했다.

주목할 점은 프랑스에선 지도자들의 글로벌 미디어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리고 결단이 24시간 영어뉴스 채널 개국을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1987년 자크 시라크 당시 총리가 상원 연설에서 “국제뉴스 영향력을 독점하는 영어권 뉴스매체와 동등한 프랑스 시각의 뉴스 방송이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게 시작이었다. 2003년 2월엔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가 유엔총회에서 미국 주도의 아프가니스탄전·이라크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설로 기립박수까지 받았는데도 CNN·폭스뉴스·MSNBC 등 미국 미디어가 다루지 않자 영어뉴스 채널 개국이 급물살을 탔다.

한국도 이젠 직접적인 글로벌 영향력 강화에 나설 때가 됐다. 24시간 영어뉴스 채널로 미국의 IRA, 중국의 사드 억지 등 한국에 영향을 주는 의제를 직접 제기할 수밖에 없다. 국민 생존과 이익을 지키려면 정부가 나서서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을 설립하고 키워야 한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국제사회의 흐름을 우리의 눈과 손발로 파악하고, 전 세계 대중에 함께 공유해야 한다.

외신 보도에 의존할 시기 지나

한국도 이젠 GDP와 문화 국력이 글로벌 미디어에 도전하기에 충분하다. 한국의 이익과 성취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언제까지 외신 보도에 의존할 수는 없다.

주목할 점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서방의 글로벌 미디어와 러시아의 RT 등 다국어 매체 간의 미디어 헤게모니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리한 보도나 가짜뉴스·왜곡정보를 통한 여론조작, 미디어를 동원한 선전·선동 등으로 내부분열을 일으키는 심리전·사이버 공격 등으로 현대전 개념을 확대한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의 ‘게라시모프 독트린’에 따른 것이라는 평가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도 이러한 ‘하이브리드 전쟁’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서방에도 러시아의 주장에 솔깃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대만을 상대로 벌이는 각종 무력 위협, 미사일과 포를 세트로 발사하고 전술핵을 거론하며 대량살상을 위협하는 북한도 이 독트린의 범주에서 움직이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한반도 상황과 한국 정부와 국민의 의지를 정확하게 알리는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외교·안보 정책의 목표로 잡은 ‘글로벌 중추 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문체부 산하 아리랑TV 노하우 활용해야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으로 국내 유일의 글로벌 영어 종합편성채널인 아리랑 국제방송(아리랑TV)이 운영되고 있다. 한류나 한국문화 소개에 더해 국내외 뉴스도 영어로 전하고 있다. BTS를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영어뉴스를 하루 270분(4.5시간) 편성해 본방 비율 중 시사보도가 57.6%에 이른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이제 패러다임을 전환할 때가 왔다. 경제적‧문화적 위상에 걸맞은 미디어 영향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여론 전쟁을 주도하려면 과감한 투자와 인식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전 세계에 특파원을 파견해 현지에서 영어로 보도하는, 경쟁력 있는 24시간 글로벌 영어뉴스 채널을 운영해야만 한다.

대외 국정 홍보도 외신에서 다루는 걸 기대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손발과 시각으로 여론 주도층과 입법자를 포함한 전 세계 시청자를 대상으로 영어로 직접 보도하는 우리의 채널이 있어야 한다. 이젠 대한민국도 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하는 시대가 됐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 그동안 성취한 것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청년들을 자극하고 새로운 일자리로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귀한 글로벌 인재를 확보하고 키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지난 1997년 개국 이래 25년 동안 전 세계에 인프라를 구비해온 아리랑 국제방송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노력과 비용을 아끼고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 대한민국이 그런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을 세우고 운영하면서 글로벌 사회에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