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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 ABCP 뭐길래…'돈맥경화' 대책, 50조원도 모자란다?

중앙일보

입력

24일 오후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현장의 모습. [연합뉴스]

24일 오후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현장의 모습. [연합뉴스]

‘레고랜드 사태’가 촉발한 채권 시장 경색에 정부가 50조원 이상을 쏟아붓겠다고 나섰다. 레고랜드 사태는 2050억원 규모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에 강원도가 보증 이행을 거부하면서 부도 처리된 사건이다. 그간 '지자체 보증=초우량등급'으로 간주하던 시장의 '공식'이 깨지면서 단기 자금 시장은 물론 회사채·국채 시장까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정부가 50조원 규모의 대책을 내놨는데도 시장에선 "과연 충분할까"라는 의구심을 보인다. 도대체 ABCP가 무엇이기에 시장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PF ABCP는 말 그대로 PF 대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기업어음(CP)이다. 유동화전문회사(SPC)가 시행사의 PF 대출채권을 담보로 ABCP를 발행하면, 증권사는 신용을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한다. 신용 등급이 높은 증권사가 '빚보증'을 서는 셈이다.

24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초부터 지난 21일까지 국내 ABCP 발행금액은 158조7700억원에 이른다. 이 중 최근 논란이 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ABCP 발행금액은 24조4400억원 규모다.

증권사, 빚 보증 서 주고 수수료 챙겨

24일 춘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의 모습. [연합뉴스]

24일 춘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의 모습. [연합뉴스]

원론적으로 시행사는 만기가 긴 회사채를 발행하면 부동산 경기 악화에 따른 위험 부담 없이 개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만기가 길수록 높은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야 하다 보니 시행사는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단기 자금을 찾게 된다. 또 통상 PF 개발 사업에서 시행사의 신용도가 낮다 보니 시행사로선 회사채는커녕 유동화증권의 발행 조건도 맞추기가 힘들다. 증권사는 이런 수요를 겨냥해 신용을 보강해 주고 만기 1년 이하인 ABCP 발행을 도와주는 대신 수수료와 이자 차익을 챙긴다.

문제는 부동산 경기가 꺾여 단기 자금에 대한 투자 수요가 사라질 때다. 만기 도래한 ABCP 차환을 위해 새로 ABCP를 발행해야 하지만 이를 사 줄 투자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시행사의 상환 능력이 부족할 경우 그 상환 부담은 빚보증을 선 증권사로 고스란히 옮겨간다. 증권사가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ABCP에 대한 보증 한도 규제가 없기 때문에 증권사는 무한대로 ABCP 보증서를 끊어줄 수 있다”며 “1~2개 사업장에서 PF ABCP가 부도가 날 경우 증권사 자체 자금으로 감당할 순 있겠지만, 업황 악화로 연쇄적인 부도 사태가 벌어지면 자본력이 약한 중소형 증권사의 경우 증권사 자체가 부도가 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의 불신에 차환 실패…보증사 부담으로

17일 오전 재건축 공사가 재개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공사현장에서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뉴스1]

17일 오전 재건축 공사가 재개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공사현장에서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뉴스1]

레고랜드 개발 사업 관련 ABCP의 경우 채무 보증은 강원도가 맡았다. 지자체가 직접 보증하다 보니 신용등급은 A1으로 최고 등급을 받아 자금을 조달했다. 그러나 강원도의 예상치 못한 보증 의무 거부에 ABCP가 부도 처리되자 그 여파는 단기채 시장을 시작으로 채권시장 전반에 퍼졌다. 지자체 보증도 믿기 힘든 판국에 증권사나 건설사 등 민간 회사 보증과 상환 능력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불신이 번져나간 것이다.

박세라 신영증권 연구원은 “지급보증의 책임자인 강원도가 보증의무를 이행하지 않자, PF 유동화 시장이 급격하게 얼어붙었다”며 “증권사뿐만 아니라 부동산 PF 지급보증 의무를 지니고 있는 건설사로까지 파장이 미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 자금이 돌지 않으면서 최종 채무자인 PF 개발업체들이 고금리를 제시하고도 차환 발행에 실패하거나, 증권사·건설사 등 보증 기관들이 ABCP를 자체 자금으로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렵게 시공을 재개한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이 최근 전자단기사채 8250억원 차환에 실패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에 조합에 보증을 선 시공사업단이 자체 자금 7000억원을 마련해 상환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50조원' 대책 내놔…효과 놓고 엇갈린 시각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자금시장 경색에 결국 정부가 나서 '50조원 프로그램'을 대책으로 내놨다. 정부는 우선 채안펀드에서 1조6000억원 규모 가용재원을 활용해 24일부터 시공사 보증 PF ABCP 등 회사채·CP 매입을 재개할 계획이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증권사와 건설사가 차환 발행해야 유동화증권 규모는 연말까지 32조원, 내년 상반기에만 57조원에 달한다.

정부 대책의 효과에 대해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황 연구위원은 “50조원 정도면 채권 시장 내 막힌 곳을 뚫어주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는 규모”라고 평가했다. 반면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부실이 확산하면 50조원이 충분할지 여부도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에선 부동산 시장 호황기에 ABCP로 실적 잔치를 벌인 증권사가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이 ‘도덕적 해이’를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증권사가 PF로 큰 수익을 냈다면, 동시에 부실에 따른 리스크도 감당해야 한다"며 "'시장의 탐욕'이 빚은 고위험 투자로 부도가 났다고 해서 공적 자금을 투입해 소생시킨다면 같은 부실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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