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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재련이 고발한다

'두더지 게임' 된 박원순 피해자 괴롭힘...상식인들 나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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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재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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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에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 장면. 오른쪽은 박원순 전 시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쓴 책의 표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지난해 3월에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 장면. 오른쪽은 박원순 전 시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쓴 책의 표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지난주는 유난히 바쁜 한 주였다. 스케줄 표가 재판·회의·상담 등으로 꽉 차 있었다. 월요일(17일) 법원으로 가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기자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측) 정철승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대한 입장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렇게 정신없고 착잡한 나날이 시작됐다.

전화를 받을 때 ‘또 시작인가 보네’라는 생각이 스쳤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기자가 보내준 정 변호사의 페이스북 글과 관련 게시물을 봤다. 박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잔디(가명)씨가 고소를 결심한 이후 직접 본인의 휴대전화를 포렌식 업체에 맡겨 복구한 텔레그램 메시지였다. 피해자는 그것을 고소장과 함께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박 전 시장 사망 후 국가인권위원회에도 냈다.

피해자는 포렌식 결과물을 수사기관에 전달하면서 대화 상대인 박 전 시장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똑같이 포렌식 절차를 밟아 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수사기관도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데 피소 사실을 알게 된 박 전 시장은 극단적 선택으로 법적 책임을 피했고, 수사기관은 가해자 사망으로 기소가 불가능해지자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국가인권위는 피해자가 제출한 포렌식 자료, 수사기관이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 고소 전 피해자로부터 피해 내용을 들은 참고인 진술 등을 근거로 지난해 1월 '고 서울시장 박원순의 피해자에 대한 행위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정 변호사가 공개한 자료는 새로운 자료가 아니었고, 심지어 그들이 복구한 자료도 아니었다. 피해자가 직접 복구해 이미 제출한 자료였다.

지난해 1월 서울시가 낸 국가인권위원회의 박원순 전 시장 성희롱 판정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공지문.

지난해 1월 서울시가 낸 국가인권위원회의 박원순 전 시장 성희롱 판정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공지문.

처음엔 이런 정 변호사의 무모한 행동이 크게 주목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의 감수성은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법정에서 나오자마자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대부분 기자였다. 한 기자는 "피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가해자의 지지자들이 입을 닫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살아 돌아와 자기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실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 변호사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담은 기사가 쏟아졌다. '피해자가 먼저 선을 넘었다' '피해자가 먼저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는 제목을 달아 내보낸 기사도 있다. 심지어 내 지인 중에도 ‘사랑한다’는 문자 속 표현에 판단이 흔들린다는 사람이 있었다. 사건 전체의 맥락을 무시하고 ‘사랑한다’는 단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반면 정 변호사의 행동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은 보기 힘들었다.

정 변호사의 무책임한 도발을 계기로 박 전 시장 지지자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내 페이스북 메신저는 다시 욕설과 협박으로 가득찼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나. 너는 살인자야 꼴 페미야’ ‘박원순 시장을 가해자로 몬 여성단체 관련 쓰레기 인간들 및 노랑머리 김재련 변호사를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 ‘너 조작질한 거 다 나왔다, 뚝배기 날릴 년’ ‘너 살아 돌아다닐 생각하지 마라’를 비롯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도 적지 않았다.

여성가족부 폐지 이슈 등으로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요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 또한 생업이 있기에 하루하루 바쁘게 산다. 피해자 역시 고단한 일상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 그런데 당초 피해자를 지원했던 두 단체의 대표와 피해자를 공동대리했던 네 명의 변호사, 그리고 피해자 본인은 또다시 이 이슈에 대해 대책회의를 해야만 했다. 이미 정리된 사건을 다시 대중에게 설명하는 일을 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모두 참담한 심경에 빠졌다.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두더지 게임’을 해 본 적이 있다. 동전을 넣고 번갈아 머리를 내밀고 올라오는 두더지를 방망이로 내리쳤다. 끊임없는 2차 가해를 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2차 가해를 한 지지자 중 일부는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일부는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 2차 가해의 1열에 서 있던 사람들이 물러나면 2열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시 유사한 공격을 시작한다. 2열이 물러나면 3열이 나타난다. 그리고 4열, 5열….

두더지 잡기 게임. 중앙포토

두더지 잡기 게임. 중앙포토

정 변호사 행위에 대한 피해자 입장을 알려 달라는 기자가 많았다. ‘사회적으로 정리된 사건입니다. 가해자 측 2차 가해가 있을 때마다 피해자 측이 직접 대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 측과 피해자의 싸움으로 협소화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2차 가해 행위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식견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가해자와 건강한 시민들의 싸움이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피해자는 단 한 명이지만 가해자의 지지자는 수 없이 많다. 그들이 싸움을 걸 때마다 피해자가 직접 맞서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위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고, 예전의 자료를 제공해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하고, 피해 진술을 위해 휴가를 내고 경찰서로 가야 한다. 개명한 새 이름을 다시 알려줘야 하고, 지지자들 주장을 그대로 싣는 기사를 보고 분노해야 하고, 그에 달린 댓글을 보고 고통받아야 한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이렇게 피해자의 일상을 집어삼킨다. 약도 소용없고, 가족도 소용없는 끝 없는 좌절의 터널로 빠지게 된다.

이 상황을 보면서 그 어떤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국가인권위의 성희롱 판단이 나왔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피해자를 2차 가해의 화형대 위에 올려놓고 장작을 들이민다.

피해자 지원단체 대표에게는 ‘박원순 등에 칼을 꽂은 X’이라는 험한 말이 쏟아진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졸지에 ‘쓰레기’가 됐다. 피해자를 대리했던 변호사는 어떤가? 살인녀, 무고 교사범으로 조롱당하고 있다. 이런 무도한 공격과 그것을 비판 없이 전달하는 보도는 결국 위력 성폭력 피해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 ‘참아, 입 닥쳐, 외부에 알리면 평생 이렇게 괴롭힘당할 거야’라는 위협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누가 감히 수많은 지지자를 등에 업은 힘 있는 가해자를 고소할 수 있겠는가? 누가 성폭력 피해를 본 피해자를 지원하고 조력하고 대리할 수 있겠는가?

나를 향해 용기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결코 용감하지 않다. 법률적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를 대리하는 것은 변호사로서의 직업적 소임일 뿐이다. 그 피해자가 현직 검사이든, 유흥업소 종사자든 달라질 게 없다. 가해자가 권력자인지 유명인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2020년 7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연합뉴스

2020년 7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연합뉴스

피해자를 응원하는 분들도 많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소망이 있다. 그분들이 세상을 향해 "(이런 식의 2차 가해를) 멈춰, 적절치 않아"라고 크게 말해주기 바란다. 피해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무수한 가해자들의 공격을 멈출 수가 없다. 위력을 가진 가해자에게 맞선 피해자의 용기는 맨 처음의 문제 제기, 그것으로 충분해야 한다. 가해자의 지지자들에 의한 무도한 공격에 맞서는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이 나라의 상식인들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