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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수낵이냐, 존슨 컴백이냐…"누가 되든 英 암울한 긴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리시 수낵 전 영국 재무장관. 리즈 트러스 사임 이후 새 총리 후보 중 한명으로 꼽힌다. AP=연합뉴스

리시 수낵 전 영국 재무장관. 리즈 트러스 사임 이후 새 총리 후보 중 한명으로 꼽힌다. AP=연합뉴스

영국이 한 달여 만에 다시 총리 선거에 들어갔다. 이르면 24일 확정될 신임 총리는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이후 다섯 번째 총리가 된다. 집권 보수당은 정국 안정을 위해 최대한 이른 시일 내 새 총리를 선출할 방침이다.

20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리즈 트러스(47)의 뒤를 이을 총리 후보는 이전 선거에 등장한 후보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트러스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리시 수낵(42) 전 재무장관과 보수당 경선에서 3위를 차지했던 페니 모던트(49) 원내대표, 벤 월러스 국방장관(52), 케미 바데노크(42) 국제통상장관, 수엘라 브레이버먼(42) 전 내무장관 등이 물망에 올랐다. 또 '파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보리스 존슨(58) 전 총리가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

수낵 전 장관은 지난 7월 당내 경선에서 137 대 113으로 트러스를 꺾었지만, 이후 당원 투표에서 트러스에 역전당했다. 이번 선거는 당내 투표로만 치러진다는 점에서 수낵이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NYT 등은 전했다. 그는 존슨 총리 시절 재무부를 이끈 경력 외에도 이전 선거 기간 트러스의 감세 정책 등에 줄곧 경고를 보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후 영국 경제가 실제 그런 길을 걸어 그가 예지력이 있음을 증명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트러스의 조기 퇴진은 영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잇따른 경제 실책이 결정타였다.

문제는 '배신자' 낙인이다. 수낵은 재무장관 시절 가장 먼저 사직서를 던져 존슨 전 총리의 사임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또 기술 관료로선 유능하다 해도, 동료 의원 중엔 그의 ‘내로남불’ 이중성을 꼬집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막대한 부를 가진 인도 국적의 부인은 세금납부 회피 논란을 빚었으며. 수낵도 미국 영주권을 보유한 채 미국에 세금신고를 한 과오가 있다. 가디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수낵의 이런 점은 "노동당에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뜩이나 노동당에 밀리고 있는 보수당 입장에선 수낵의 집권이 2024년 총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도 그는 강력한 총리 후보로 꼽힌다. 팀 베일 런던 퀸메리대 정치학과 교수는 NYT에 "리시 수낵은 분명 앞서 있다"며 "관건은 '그를 용서할 수 있느냐'인데,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해 그럴 준비가 돼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보리슨 존슨 전 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 사임 후 신임 총리 선거에 나설 지 주목된다. AFP=연합뉴스

보리슨 존슨 전 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 사임 후 신임 총리 선거에 나설 지 주목된다. AFP=연합뉴스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존슨 전 총리가 다시 나설지도 주목된다. 그는 지난 17~18일 유고브가 보수당원 530명을 대상으로 한 후임 총리 설문조사에서 지지율 32%로 1위에 올랐다. 이어 수낵(23%)·월러스(10%)·모돈트(9%)가 뒤를 이었다.

존슨 전 총리의 지지자 중 한명인 제임스 더드리지 하원의원은 이날 트위터에 "다시 돌아올 시간"이라며 그의 복귀를 재촉했다. 이들은 2019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압승을 이끈 존슨이 다시 내각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원 특권위원회가 '파티게이트'와 관련해 존슨이 당시 의회에서 거짓말을 했는지 등을 조사 중이라는 점이 걸림돌이다. 또 그가 출마를 선언한 순간 일련의 스캔들을 상기시키는 등 부정적인 면이 부각될 것이라고 NYT는 전했다. 또 특권위원회가 존슨 전 총리의 권한 정지 등을 권고할 수 있다는 점도 위험 요소로 꼽힌다고 덧붙였다. 존슨 전 총리는 사임 전 후임으로 "수낵만은 안 된다"고 했는데, 이번 선거에 나선다면 수낵과 결전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페니 모돈트 영국 보수당 원내대표. 새 총리 선거에 나설 후보 중 한명으로 꼽힌다. 로이터=연합뉴스

페니 모돈트 영국 보수당 원내대표. 새 총리 선거에 나설 후보 중 한명으로 꼽힌다. 로이터=연합뉴스

존슨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모던트 원내대표는 지난 당내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경선 초반 트러스를 앞서기도 했다. 트러스 총리와 거리를 두며 혼란의 시기에 크게 상처받지 않았으며, 때때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이 보수당 내에서 인기 있는 선택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그러나 모던트 원내대표도 트러스와 마찬가지로 총리 후보로서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게 약점이다.

벤 월러스 영국 국방장관. 영국의 신임 총리 선거에 나설 후보 중 한명으로 꼽힌다. EPA=연합뉴스

벤 월러스 영국 국방장관. 영국의 신임 총리 선거에 나설 후보 중 한명으로 꼽힌다. EPA=연합뉴스

월러스 국방장관은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여야 불문하고 지지를 받고 있다. 또 보수당 내부 다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과 여론조사 3위를 달리는 점도 장점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당대표직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 밝힌 만큼 총리 선거에 나설지 불투명하다.

바데노크 국제통상장관은 지난 당내 투표에서 4위를 차지했다. 가디언은 확고한 우파적 견해와 유창한 수사, 어느 정도의 능력 등이 보수당 의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트러스의 정치적 동료였지만 최근 사직서로 트러스를 저격한 브레이버먼 전 장관도 후보 중 한 명이다.

누가 총리가 되든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가격, 고용 불안과 경기 침체 등 무거운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NYT는 전망했다. 이로 인해 차기 총리는 정치권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출 삭감 정책과 엄격한 재정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2008년 금융위기 때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가 택한 암울한 긴축 정책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조나단 포르테스 런던킹스칼리지 경제학과 교수는 "수낵 등 차기 총리가 시장을 진정시킬 수도 있지만, 보수당의 상황을 볼 때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세계 금리가 치솟고 있으며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영국의 상황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위험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보수당 1922 위원회는 이번 당 대표 경선에 나서기 위해선 동료 의원 10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후보는 2~3명으로 좁혀질 것으로 관측된다. 위원회는 이르면 24일, 늦어도 28일까지 새 총리를 선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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