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부터 마신셈…북진 그 뒤, 한·미 '평양 통치권' 다퉜다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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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컸던 한국과 미국의 시각차 

1950년 10월 1일. 감격스러운 북진이 개시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군이 수복한 북한 지역의 통치를 놓고 한국 정부와 유엔(엄밀히 말해 미국)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정부는 당연히 우리가 관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헌법에 정의한 것처럼, 북한을 우리의 영토로 봤기 때문이고, 설령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분단된 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북을 우리와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없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 제3사단의 38선 돌파를 기점으로 역사적인 북진이 개시됐다.

1950년 10월 1일, 국군 제3사단의 38선 돌파를 기점으로 역사적인 북진이 개시됐다.

하지만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당장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고를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38선이 승전국의 합의에 따라 그어졌으므로 소련이 군정을 실시한 이북은 이남과 엄연히 별개라고 본 것이다. 이처럼 38선 이북에 대한 우리 정부와 유엔군을 주도하는 미국의 시각 차이는 현격했다.

미국은 궁극적으로 통일을 반대하지 않았으나 한국이 곧바로 북한을 흡수하기는 곤란하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새로운 통일 정부는 유엔의 결의를 거치고 총선 같은 합법적인 절차를 마친 뒤 수립돼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형식상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도 유엔의 관리하에 있으므로 다양한 참전국들의 입장을 고려할 때 이런 절차가 합리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미국의 계획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먼저 1단계로 북한 지역의 질서 회복이 급선무이니 군사적으로 점령이 완료된 뒤 사회가 안정될 때까지 유엔군 사령부가 군정을 펼치고, 2단계로 한반도 전역에서 유엔의 통제 아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 뒤, 마지막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유엔군이 철군하며 군정을 끝내는 것이었다.

국군을 환영하는 함흥 시민들. 하지만 점령지 통치를 놓고 우리 정부와 미국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중앙포토

국군을 환영하는 함흥 시민들. 하지만 점령지 통치를 놓고 우리 정부와 미국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중앙포토

그래서 미국은 한창 북진 중이던 50년 10월 12일에 열린 유엔 총회 임시위원회에서 ‘유엔은 한반도 전역을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정부를 공식 인정한 바 없다’는 내용을 가결시켜 북한에 대한 한국의 통치권을 부인했다. 한마디로 강대국만이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자 유엔 결의가 통과된 당일 조병옥(趙炳玉) 내무부 장관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즉시 행정관을 파견해서 북한 통치에 들어갔다.

떡 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장은 유엔군의 도움이 절실한 처지였기에 우리 정부는 명분으로 삼고자 미국이 계획하는 군정이 특별히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45~48년 사이에 있었던 군정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아 거부감이 컸던 점이 사실 가장 큰 이유였다. 곧이어 10월 17일, 정부가 임명한 계엄사령관이 이북에 계엄령을 포고했고 10월 22일에는 평양 시장을 임명했다.

1950년 10월 30일 평양을 방문해 시민들의 환영을 받는 이승만 대통령.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된 뒤였다. 중앙포토

1950년 10월 30일 평양을 방문해 시민들의 환영을 받는 이승만 대통령.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된 뒤였다. 중앙포토

예상을 벗어난 강경한 태도에 놀란 미국은 10월 23일, 유엔군 사령관 명의로 한국 정부에서 파견한 인원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고 대신 12명의 민간인을 관리위원에 앉혔다. 이로 인해 한국 관리와 유엔군이 임명한 행정관이 곳곳에서 대립했다. 당연히 점령지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결국 전쟁 중에 이러한 대립은 곤란하다는 판단이 들자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양측은 유엔군 사령부가 임명한 요원이 통치를 담당하되 한국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런 대립과 타협도 10월 25일, 중공군이 전격적으로 개입하면서 한순간의 꿈으로 막을 내렸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중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설령 전쟁에 개입하더라도 형식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 오판했을 만큼 중공군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은 개전 초 미군의 참전처럼 6ㆍ25 전쟁이 또다시 극적으로 바뀌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기분 좋게 38선을 넘은 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능가하는 더 빠른 속도로 후퇴에 나서야 했다. 더불어 공산 학정을 경험한 많은 북한 주민들도 고향을 떠났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탈환한 서울을 석 달 만인 이듬해 1월 4일에 다시 내주고 난 후에야 중공군의 남진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전시였으므로 수복 지역 통치권에 대한 다툼은 최대한 자제했어야 했다. 결국 쓸데없이 힘만 소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통한의 후퇴가 시작되기 직전인 1950년 11월 10일 발행된 통일기념우표도 당시의 성급함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다. 국가기록원

전시였으므로 수복 지역 통치권에 대한 다툼은 최대한 자제했어야 했다. 결국 쓸데없이 힘만 소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통한의 후퇴가 시작되기 직전인 1950년 11월 10일 발행된 통일기념우표도 당시의 성급함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다. 국가기록원

외교적 마찰도 불사하며 북한 지역 통치를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은 잠시의 공염불에 불과했다. 전쟁 중 점령지 관리는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 한국과 미국은 점령지의 안정이 아니라 누가 통치권을 행사할 것인가라는 명분에만 집착해서 필요 이상으로 대립했다. 한마디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었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사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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