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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러=150엔' 무너졌다…구로다 고집에 160엔까지 밀릴 수도

중앙일보

입력

20일 일본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가 달러당 150.038엔까지 밀렸다. '1달러=150엔'이 무어진 것은 1990년 이후 32년만에 처음이다. 로이터=연합뉴스

20일 일본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가 달러당 150.038엔까지 밀렸다. '1달러=150엔'이 무어진 것은 1990년 이후 32년만에 처음이다. 로이터=연합뉴스

'1달러=150엔'이 무너졌다. 32년만이다.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던 150엔이 붕괴하자, 일본 정부는 국채 무제한 매입에 나섰다. 중국 위안화도 외환시장 개방 이후 12년만에 최저 수준으로 주저 앉았다. 엔화와 위안화가 약세를 이어가며 아시아 금융시장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0일 도쿄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가 장 중 달러당 150엔대로 밀려 내려갔다. '1달러=150엔'이 무너진 건 ‘거품 경제’ 후반기였던 1990년 8월 이후 32년 만에 처음이다. 앞서 뉴욕외환시장에서 엔화값이 달러당 149.9엔까지 밀리며 불안한 조짐은 이어졌다.

엔화가치 하락에 압력을 더한 건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 급등이다. 19일(현지시간)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장중 한때 4.129%까지 치솟으며 200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4%포인트 수준까지 벌어지면서 자본 유출 위험이 커진 탓이다. 일본은행(BOJ)은 10년 만기 국채금리를 0.25% 선에서 유지하는 수익률곡선통제(YCC)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엔화의 자유낙하와 함께 일본 채권 시장도 요동쳤다. 20일 오전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전날보다 0.005%포인트 오르며 0.255%에 머물렀다. 일본은행의 목표 수준(0.25%선)을 벗어난 것이다. 일본은행이 국채 금리 상승을 용인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투자자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블룸버그는 이날 "일본은행과 다른 중앙은행과의 통화 정책 격차가 심한 만큼, (10년물 국채금리 급등은) 결국 수익률곡선통제 정책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시장 전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일본은행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달 처음으로 긴급 채권매입에 나섰다. 블룸버그 통신은 "일본은행이 5년물 이상 국채를 2500억엔어치 사들일 계획이며, 별도로 10년물 국채도 금리 0.25%에 무제한 매수 주문을 냈다"고 보도했다.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1달러=150엔'이 무너진 만큼 일본 통화당국의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도 커졌다. 엔화의 자유낙하에도 인내심을 보였던 일본 통화당국도 '1달러=150엔'은 버거운 모양새다. 통화당국자들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전날 "최근의 엔저는 급속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돼 경제에 마이너스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며 경계감을 드러냈다. 지난 3월 “엔저는 일본 경제에 플러스(+)로 작용한다”고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도 20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환율 시장의 과도한 변동에 대해 앞으로도 적절한 대응을 취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시장개입의 약발이다. ‘반짝효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엔화가치가 145엔대 후반까지 밀린 지난달 22일 일본 통화당국이 24년 만에 달러를 팔아 엔화를 사들이는 ‘외환 개입’에 나섰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엔화약세를 풀 근본적인 해결책은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전환이다.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긴축에 나서는 상황에서 통화 완화의 마이웨이를 걸어서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돈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어서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는 4%포인트까지 벌어진 상태다.

노르웨이 최대 은행 노르데아는 엔화 하락을 멈추려면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이 변하거나 다른 주요 10개국(G10) 중앙은행이 모두 180도 돌변해야 한다"며 "완화 정책을 고수하는 한 일본 정부의 개입에도 엔화가치가 '1달러=160엔'까지 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1달러=150엔' 붕괴에도 구로다 총재가 긴축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구로다 총재가 퇴임하는 내년 4월까지 일본은행이 완화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을 계속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외환시장이 심각해져도 당장은 시장 개입과 YCC 금리 조정 등의 부수적 방안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일본은행이 저금리를 통한 통화 완화정책을 고수하는 건 엔저를 통한 경기 부양을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이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에 비해 일본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낮은 것도 일본은행이 머뭇대는 이유기도 하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안올리는 것'이 아닌 '못올리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발목을 잡는 건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약 256%달하는 1016조엔(약 1경원) 수준의 막대한 국가부채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작은 금리 인상으로도 일본 정부가 내야 할 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위안화마저 불안한 흐름을 보이며 엔화가치 급락만으로도 어수선한 아시아 금융시장의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19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역내 위안화 가치는 달러당 7.2279위안에 거래를 마쳤다. 2008년 1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역외 위안화 가치도 달러당 7.2437위안에 장을 마감했다. 역외시장이 열린 2010년 8월 이후 최저치다.

위안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건 중국의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다. 중국 정부가 당대회에서 '제로 코로나' 정책 고수 의지를 밝힌 데다, 3분기 경제성장률 수치 공개를 무기한 연기하는 등 중국 경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호주의 커먼웰스 은행은 20일 보고서를 통해 “위안화가 달러당 7.30 위안으로 밀리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전망했다.

아시아 양대 통화인 엔화와 위안화 약세는 원화약세로도 번져올 수 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단기간에 두 통화의 약세 흐름을 바꾸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 상당기간 원화 약세에 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7.1원 내린(환율상승) 달러당 1433.3원에 거래를 마쳤다. 3거래일만에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엔화와 위안화의 동반 약세는 아시아 금융시장을 흔들 수도 있다. 지난달 블룸버그는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자산운용 회장을 인용해 “'1달러=150엔' 등 특정 지지선이 뚫리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같은 규모의 혼란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엔화가치가 폭락하면 해외 펀드가 아시아 시장 전체에서 자금을 회수하는 등 대규모 자본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자산운용사 SPI애셋매니지먼트의 스티븐 이네스 파트너는 “위안화 약세는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항상 우려스러운 전조”라며 “유로화 가치 하락과 더불어 G10 (통화가치)에서도 출혈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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