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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이중구조 해소, 산업특성에 맞게…정부 정책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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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 7월 25일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작업자가 진수 작업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 앞쪽이 하청지회 노조가 농성을 벌이던 독이 있던 자리다. 농성했던 선박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연합뉴스

지난 7월 25일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작업자가 진수 작업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 앞쪽이 하청지회 노조가 농성을 벌이던 독이 있던 자리다. 농성했던 선박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연합뉴스

정부의 고용·노동정책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행정력을 동원한 압박 대신 자율을 꾀하는 쪽으로다. 정부는 뒤에서 잘 꾸려갈 수 있게 지원하는 데 방점을 뒀다.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고, 노사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을 지양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19일 정부가 발표한 '조선산업 격차 해소 및 구조개선 대책'도 그런 틀에서 짜였다.

정부는 2018년부터 5년 동안 조선업에 5000억원이 넘는 각종 재정지원을 해왔다. 하지만 "이런 재정지원은 조선업이 유지되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이번 대우조선해양 사태에서 나타난 것처럼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는 데는 실패했다"(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 교수)는 게 학계와 경영계, 정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또 "지난 정부에서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를 목표로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인상하고, 산업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전체 사업장에 주52시간제를 획일적으로 시행하는 등 일방적 규제 중심으로 변화를 추구했으나 결국 부작용만 양산했다"(김태기 단국대 경제학 명예교수)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대책의패러다임이 정부 주도, 획일적 규제 적용에서 산업계 주도, 시장 질서 회복으로 바뀐 이유다. 정부는 무엇보다 원·하청 이중구조에 대해 공정거래의 관점을 강조했다. 정부가 원청을 압박해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도급 계약의 공정성과 같은 거래 질서 확립을 통해 격차를 줄이겠다는 의미다. 압박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듯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인 공정한 산업체계 구축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의식한 방안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원·하청 상생 협력'을 강조했다. 관련 실천협약을 원·하청 간에 체결하고, 이를 이행토록 한다는 것이다. 이 협약에는 적정 기성금 지급, 원청과 협력업체 근로자 간 이익 공유, 직무·숙련 중심의 임금체계 확산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구축, 다단계 하도급 구조 개선 등이 담긴다.

이런 내용은 원청도 동의하는 사안이다. 수주량에 따라 부침이 심한 조선업의 특성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모 원청사 임원은 "하청업체 근로자의 임금이 원청 근로자의 80% 이상이 되도록 체계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실태조사를 한 결과 현재 하청업체 근로자의 임금은 원청 대비 45~70%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원청이 하청업체에 대한 지원을 모두 부담토록 하는 누르기식 정책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협약에 참여하고 이행하면 인센티브로 참여기업에 각종 장려금과 수당 등을 우대 지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숙련퇴직자 재고용 장려금, 기술전수수당, 계속고용장려금, 공동이용시설 개선 비용 같은 것이다.

지난 7월14일 오후 울산 동구 라한호텔에서 열린 '2022 조선업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기업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이번 박람회에는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사내 협력사 30개 업체가 참여해 배관, 도장, 전기, 중장비 등 직종에 256명을 모집했다. 뉴스1

지난 7월14일 오후 울산 동구 라한호텔에서 열린 '2022 조선업 채용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기업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이번 박람회에는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사내 협력사 30개 업체가 참여해 배관, 도장, 전기, 중장비 등 직종에 256명을 모집했다. 뉴스1

인력난을 덜어주기 위해 외국인 근로자 도입도 수월하게 해준다. 주52시간제의 획일적 적용으로 선박 납기일에 쫓기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근로자의 임금 저하를 불러온 연장근로 제한 조치도 특별연장근로와 같은 유연한 근로시간 활용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재직자의 복리후생을 지원할 금융 우대조치도 마련했다. '조선업 상생지원 패키지 사업'이란 이름으로다.

협약 이행은 지역노사민정협의회 등에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모니터링하고, 이후 정부 합동평가단을 구성해 종합 평가한다. 정부는 여기에 덧붙여 산업계가 요구하는 규제혁신도 추가로 발굴해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요약하면 조선업 원·하청사들이 내년 초까지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선정해 협약을 체결하고, 이를 이행하면 정부가 평가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관계부처(고용노동부·공정위·산업통상자원부) 합동으로 매년 하도급 실태조사를 병행한다. 그러면서 규제 혁파를 통해 조선산업의 숨통을 트고, 도약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정부는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늘 정부 주도로 끌고 가는 모양새를 띄었다. 버티는 소에 코뚜레를 얼마나 크고 굵게 꾀어 제압하고 길들이느냐에 방점을 찍었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잘 부려먹기 위한, 그러면서 대외에 보여주고, 정부의 힘을 과시하는 듯한 인상의 정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번 조선업 이중구조 해소 대책에서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고 한 것이라곤 일종의 가이드라인 정도다. 12월까지 조선업 표준하도급 계약서를 개선하고, 내년 상반기까지 하도급 대금 결제조건 공시를 의무화하는 정도다. 대규모 자금 투입이나 기업의 손목 비틀기, 고용시장에 직접 개입해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식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고용지원 대책도 빠지지 않았다. 조선업의 만성적인 숙련공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신규 인력 유입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내년부터 청년에게 3개월 근속 시 취업정착금으로 100만원을 준다. 연간 근로자가 150만원을 내면 정부와 자치단체가 각각 300만원, 150만원을 추가 적립해 총 600만원을 적립시켜주는 조선업 희망공제 지원을 2000명에게 준다. 주요 조선사들이 2년 이상 재직한 하청 근로자에게 정규직 채용기회를 부여하는 '채용사다리 제도'도 복원한다. 이 제도는 2016년까지 현대중공업 등에서 실시했으나 수주 급감에 따른 조선산업의 불황과 맞물려 사라졌다. 하청 근로자에게 임차료와 교통비와 같은 복리후생 지원도 확대한다.

권기섭 고용부 차관은 "하청업체의 경우 호황기 성업하다 불황기에 폐업하는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하청근로자의 임금 체불도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물량팀 중 상당수는 "더 이상 임금체불을 겪기 싫어서 사회보험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물량팀에서 일하겠다"고 하는 상황이다. 임금체불은 정부가 나서야 하는 중대한 노동법 위반행위다.

그래서 정부도 "체불 다발 조선업체에 대해서는 기획감독과 직권조사를 실시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특히 원청이 노무비를 신탁계좌에 지급하고, 하청의 임금 지급내역을 확인한 후 인출하도록 허용하는 '노무비 구분지급 확인제'를 강력하게 시행할 계획이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최근 탄소중립 등으로 친환경 선박 수주가 증가하면서 조선업은 반전의 계기를 맞고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산업의 업황 개선과 고용구조 개선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일방적인 규제나 재정지원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이번 대책은 산업의 주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꾸린,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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