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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자들 불러 차용증 찢었다" 말기암 환자들의 떠날 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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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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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환자는 죽음을 어떻게 대할까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지난해 사망자의 74.8%는 일반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숨졌다. 가정 사망은 16.5%에 불과하다(나머지는 교통사고 등). 병원 비율이 미국(35%)보다 훨씬 높다. 김도경 동아대 의대 교수(의료인문학교실)는 『죽음학 교실』(허원북스)에서 “생애 말기를 병원에서 보내다 사망하면서 가정이나 일상에서 죽음을 관찰하기 어려워졌고, 삶이 점점 죽음과 무관한 것처럼 다루어진다”고 진단한다. 죽음이란 게 이를 예견하는 전문가(의사)의 기술적 현상이자 금기 대상이 됐고, 준비하지 못한 채 맞는 낯선 현상이 됐다.

박소정 국립암센터 호스피스완화의료실 전문의는 “말기 진단을 받고 호스피스로 오는 환자는 대부분 단절감·좌절감·불안을 많이 느낀다”고 말한다. 말기 환자의 3~16%는 우울장애를 겪는다. 슬픈 느낌에서 시작해 우울한 기분, 적응 장애, 우울 장애 순으로 이어진다.

9명 집중 면담 결과 4단계 분류
채무자 앞에서 차용증 찢어 선물
“어릴 때 소풍처럼 설레며 준비”
분노와 두려움에 떠나는 경우도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센터에서 한 말기 환자(왼쪽)가 기도하고 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센터에서 한 말기 환자(왼쪽)가 기도하고 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한 말기 암환자(38)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빨리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게 슬프다. 나의 인생은 완전히 망한 삶”이라고 토로했다. 75세 췌장암 말기 환자는 3년 전 연명의료를 거부하며 “할 만큼 했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그만 고통받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갑자기 악을 쓰거나 이상한 말을 쏟아내는 섬망 증세가 와서 가족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죽음학 교실』)

일부 환자는 호스피스에서 의미 치료, 음악 치료, 영적 치료, 통증 조절 등을 받으면 많이 달라진다. 이근무 HA연구소장, 김경희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연구원, 유지영 한림대 고령사회연구소 조교수는 지난 8월 ‘한국노년학’ 학회지에 ‘말기암 노인환자들의 죽음인식에 대한 현존재분석’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호스피스 병동의 60대 말기 암환자 9명을 6회씩 면담한 뒤 겸손한 체념 등 17개 범주로 나눠 죽음 인식을 분석했다. 죽음을 향하는 존재의 구조를 4단계로 유형화했다.

“가족부양 짐 내려놓으니 축복”

우선 집착 내려놓기이다. 대장암 환자 A(68)씨는 “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다. 암은 죽음의 예고이고, 역설적으로 무거운 짐을 내려놔도 되는 축복”이라고 말했다. 음식업을 한 간암 환자 B(60)씨는 “죽을 때 가족 빼고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것만큼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라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삶의 손익계산서를 따지기도 한다. 공직자 출신의 간암 환자C(65)씨는 암 진단 5년이 됐다. 그녀의 생각이다. “꽤 많은 돈을 떼였는데, 그를 어마어마하게 저주했지요. 순간 ‘내가 업을 짓는구나’ 그랬어요. 그래서 ‘내 돈 가지고 잘 살아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동안)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적자인 거지요, 적자. 남은 생이 별것 아니에요. 조금 더 착한 일을 하면 적자를 메우지 않을까.”

그녀는 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살았다. 아파트도 지고 살고, 상가·돈도 지고 사니 얼마나 무거우냐. 저승 가려면 달팽이 집(지금까지 이룬 것)을 내려놔야 하는데”라고 탄식한다. 폐암 환자 D(66)씨는 육체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결국 죽을 수 있지만,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꼿꼿하게 맞설 거다. 암이란 놈에게”라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아무리 내려놓으려 해도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자식이다. 위암 환자 E(63)씨는 51세 때 암 진단을 받고 완치 진단이 나왔으나 재발했다. 그녀는 “막상 가려니 미련이 너무 많다. (중략) 남편한테는 별 미련이 없다. 하지만 애들(2명)만큼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더라. 효도를 받자는 게 아니라 그냥 걱정되고…”라고 말했다.

형제와 화해, 기부금 사용처 확인

이웃과의 공존도 모색한다. 폐암 환자 F(65)씨는 재산의 3분의 1을 기부했다. 그는 “복지단체에 기부한 돈이 건물 수리에 잘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더라. 가보니 내 집처럼 좋았다”고 말했다. B씨는 채무자들을 불러서 보는 앞에서 차용증을 찢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선물을 주려 했다”고 말했다. A씨는 형제와 화해했고, D씨는 “묘지 치장할 돈을 고향에 기부하라”고 유언장에 썼다. 위암 재발환자 G(65)씨는 “내 욕심이 암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말기 환자는 ‘또 다른 길’ 떠날 채비를 한다. G씨는 “어릴 때 소풍이 얼마나 좋았냐. 사는 게 소풍 온 것이고, 죽는 것은 또 다른 소풍이니까 설레며 준비해야지”라고 말했다. 이들은 졸업시험 준비, 하늘 가는 길에 꽃씨 뿌리기, 용서를 통한 마무리 시작 등으로 받아들였다.

김대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권역호스피스센터장은 “대부분의 말기 환자는 분노를 버리지 못하고 잊힐까 두려움을 느끼며 세상을 떠난다. 호스피스로 와서도 왜 왔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수용하는 사람이 가물에 콩 나듯 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말기 환자의 대부분이 일방적으로 끌려와서 호스피스에 맡겨졌다고 여긴다. 본인이 아니라 가족과 의사가 결정했기 때문”이라며 “항암치료 과정에서 의료진이 환자와 소통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3분 진료’ 개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