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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삶은 땅콩 덕분에 알게 된 아빠의 사랑

중앙일보

입력

[퍼즐] 최창연의 원룸일기(7) 

땅콩을 좋아한다. 볶은 땅콩이나 조림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삶은 땅콩이다. 껍질째 삶아 까먹는 것인데, 수확 후 며칠만 지나도 껍질이 말라서 삶으면 맛이 없어지기에 이맘때만 잠깐 맛볼 수 있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삶은 땅콩은 경상도 지방에서만 먹는 음식임을 알게 되었다. 갓 캐내어 물기를 머금고 있는 땅콩으로만 가능한 조리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올봄에 우리 가족은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여러 가지를 함께 키웠다. 엄마가 좋아하는 토마토, 아빠가 좋아하는 얼갈이배추, 동생이 좋아하는 밤고구마, 내가 좋아하는 땅콩, 그 외에도 가지나 고추 등을 작은 땅에 나누어 심었다. 토마토와 채소들은 여름부터 부지런히 따다 먹고, 고구마와 땅콩도 무럭무럭 자라 수확의 시기가 다가왔다.

지난주 아침, 아빠와 함께 고구마와 땅콩을 수확했다. 아빠가 커다란 삽으로 고구마를 파내면, 내가 손으로 건져 상자에 담았다. 아빠가 땅콩 줄기를 뿌리째 뽑아두면 내가 따라가서 땅콩 열매를 따다 흙을 털고 봉투에 담았다. “우리 진짜 환상의 짝꿍이다. 그치?” 나의 말에 아버지가 웃으셨다. 그릇에 담긴 삶은 땅콩을 까먹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것이라니! 안동에 내려갈 때마다 이것저것 따다 주시던 아빠는 얼마나 자주 밭에 다녀갔을까.

[그림 최창연]

[그림 최창연]

담장에 걸터앉아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쉴 때는 말 없는 아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신다. 평소 표정 변화도 크게 없는 아빠지만, 밭 이야기를 할 때는 신이 나서 말이 많아진다. 한참을 이야기를 듣다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나야... 느그들 키울 때지. 니들은 쑥쑥 크고, 돈을 버는 일도 멋이 있었다."

아버지 나이 마흔에 늦둥이 동생이 태어났다. 둘째가 태어나서 힘들지 않으셨냐 물었더니, 그때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얼마든지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젊고 단단한 아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언젠가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 어디로 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너무 많은 곳이 떠오르지만 하나를 고르라면 1986년 이라크 어딘가를 가보고 싶다. 그곳에는 젊고 단단한 나의 아버지가 있다. 육 남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현장 일을 시작하셨고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오셨다. 1980년대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원하는 젊은 남성들이 중동 파견에 지원했고, 아버지도 그중 한 분이셨다. 내가 태어나고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 이라크로 건너가셨다.

우리 집 앨범에는 그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보잉 선글라스를 끼고 커다란 트럭 앞에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까만 얼굴로 웃고 있다. 영어도 한마디 못하고, 음식도 꼭 한식만 먹어야 하는 아버지는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떤 마음으로 힘든 밤들을 보냈을까? 그때의 아빠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얼마 전, 마을 어르신들을 인터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지인을 만나, 어떻게 하면 부모님 자서전을 쓸 수 있는지 물어봤다. 부모님께 지난 일을 물어도 돌아보면 다 좋았다는 두루뭉술한 대답뿐이라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의 삶의 큰 궤적뿐 아니라 독특하고 고유한 사건들도 궁금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어른들께 인터뷰할 때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자면 “아빠, 아빠가 고모 학교 뒷바라지를 했다고 했잖아? 그러면 고모 도시락을 직접 싸줬어? 반찬은 어떤 걸 해줬어? 아빠 중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는 이름이 뭐야?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와 같이 물어봐야 한다고.

사랑이란 자잘한 것을 아는 일이다. 젊을 때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요즘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어떤 반찬을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안동에서 올라오는 날, 나의 손에는 엄마가 챙겨준 한의원 가방이 들려있다. 그 안에는 보약 대신 새로 담은 김치와 콩자반, 그리고 햇땅콩이 들어있다. 집에 와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반찬을 정리해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껍질이 마르기 전에 땅콩을 삶았다. 아빠가 아침저녁으로 뿌린 물줄기를 품고 있는 땅콩을.

사랑의 마음은 마치 삶은 땅콩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봄에 모종을 심는 마음과 비슷하다. 아침저녁으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밭으로 가서, 작은 땅콩에 물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껍질이 마르기 전에 빨리 땅콩을 따서 삶아 먹자고 재촉하는 마음과 비슷하다. 역시 나는 아직도 그 마음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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