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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전 간부 등 영입, 산업계 대미 로비·정보획득 총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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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08면

기업들 ‘미국 우선주의’ 대응 부심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포킵시 IBM 연구센터에서 연설 중인 조 바이든 대통령. IBM은 이날 뉴욕 허드슨밸리 지역에 10년간 2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포킵시 IBM 연구센터에서 연설 중인 조 바이든 대통령. IBM은 이날 뉴욕 허드슨밸리 지역에 10년간 2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미국 반도체 장비업체들로부터 이미 몇 달 전부터 미국 상무부에서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와 관련한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이 돌았고, 한국 기업들과 정부는 일찌감치 관련 채널을 가동해 대응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미국 정부의 대(對)중 반도체 장비·기술 수출 제한 조치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 상무부가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한지 일주일도 안 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예외 조치를 얻어낸 배경에는 과거와 달라진 기업들의 대미 활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는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에서 대중 반도체 장비·기술 수출 제한 조치가 내려질 것이란 얘기가 돌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번 규제 조치의 타깃이 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AI) 분야에 활용되는 첨단 반도체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들의 주력 상품인 고성능 메모리반도체도 포함될 것이란 얘기가 돌면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더구나 미국 국회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일사천리로 처리한 것을 감안하면 반도체 수출규제도 빠르게 전개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높았다. 관계당국도 업계 관계자들과 비공개 회의를 진행하며 대응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가 관련 조치를 1년간 유예하기로 하면서 반도체 업계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미국 방문하기도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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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 분야에서 ‘자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분명히 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미국 내 법인 설립과 설비 투자뿐만 아니라 정보 획득과 로비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로비가 합법화된 미국에서 관련 비용으로 사상 최대 금액을 갈아치우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미국 로비활동 분석업체 오픈시크리트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양대 업체가 올해 상반기 미국에서 사용한 로비금액은 475만 달러(약 68억원)에 이른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에만 미국에서 로비자금으로 251만 달러(약 36억원)를 썼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1.8%나 늘어난 금액으로 반기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같은 기간 대만과 일본 경쟁사인 TSMC(147만 달러)와 키옥시아(30만 달러)의 로비자금을 합쳐도 삼성전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SK하이닉스도 224만 달러(약 32억원)를 뿌리며,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국내 기업들의 로비 규모는 정부에 필적한다. 예컨대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4년간 약 351만 달러(한화 약 50억원) 규모의 자금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의원실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아놀드앤포터, 에이킨컴프, 홀랜드앤나이트, 케이앤엘게이츠 등 미국 로펌 7곳과 자문 계약을 맺고 미국의 통상정책 동향과 주요 법안 관련 조사 분석 등을 진행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오픈시크리트에 집계된 한국 정부(공사, 공기업 등 제외)의 올해 상반기 미국내 로비자금 규모도 43만5033달러(약 6억원) 수준이다.

국내 기업들의 로비 자금만 늘어난 것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의 움직임은 변화한 미국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과거 한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며 한국 기업을 압박했던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신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 등 미국 우선주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다룬 미국 상·하원을 중심으로 물밑 작업이 집중된 것이다. 예컨대 삼성전자를 대신해 ‘칩스포아메리카법’과 미국 혁신경쟁법(US Innovation and Competition Act) 등을 주요 이슈로 지난 2분기 로비 활동을 벌인 미국 로펌 아놀드앤포터의 보고서에는 미국 상·하원이 로비 대상으로 기록돼 있다. IRA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Act)’ 법안과 전기차 보조금 등을 주요 이슈로 지난 2분기 현대차의 로비활동에 나선 미국 로펌 케이앤엘게이츠의 보고서도 미국 상·하원과 미국 에너지국 등을 로비 대상으로 적시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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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측면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들이고 있다는 신호는 오래 전부터 나왔다. 삼성전자가 고용한 로비스트 수는 지난해 말 32명으로 전년 대비 4명 늘었다. SK하이닉스도 같은 기간 21명에서 25명으로 늘어 역대 최고 수준이다. 질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 대사를 북미대외협력팀장 부사장으로 영입해 대관 업무를 총괄하게 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북미 대외협력사업 강화를 위해 부회장직을 신설했고, 유정준 SK그룹 부회장에게 중책을 맡겼다. 이 같은 행보는 IRA에 직격탄을 맞은 배터리와 자동차 업체도 확인할 수 있다. LG그룹에선 올해 2월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을 영입한 데 이어 6월에는 LG에너지솔루션이 해외대관팀을 신설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 사이에선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대관 인력과 비용을 늘렸다”며 “한국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다 보니 기업들 입장에서는 안테나를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대미 활동에서 약했다는 평가를 받던 현대차그룹도 올 들어 관련 대미 활동을 늘리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올해 상반기 미국에서 사용한 로비금액은 93만 달러(약 13억원)로 도요타(316만4016 달러)나 혼다(170만 달러) 등 경쟁사에 비해 많지 않지만, 7월 말 IRA 법안 통과 가능성이 갑작스레 수면 위로 부상하자 8월 1일자로 북미법인의 고위급 인사를 단행한 바 있다. 이후 현대차그룹은 미국 내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8월 말 열흘 일정으로 직접 미국을 방문했다. 공영운 현대자동차 사장은 지난 4일 산업통상자원부 국감에서 “미국 소비자 입장에서는 현대차를 구입하기에 상당히 어려운 장벽을 만났다”며 “IRA 시행으로 판매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상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의 자본과 인력이 당분간 미국 내 정보 획득에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고 있다. 여기서는 지난 7월 27일 공개된 IRA 법안이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IRA 법안이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극비리에 준비되고 일사천리로 통과되는 모습을 지켜본 국내 기업 대부분이 대미 정보전에 총력을 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지난 7월 14일까지만 해도 상원 통과가 물 건너간 것으로 여겨졌던 IRA 법안은 조 맨친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의 급작스런 입장 번복에 2주 만에 사실상 통과가 확실시됐다. 조 맨친 의원의 연막 작전이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가운데, 미국 민주당 상원 의원 가운데 일부는 법안이 상정됐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는 얘기다. 실제로 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은 지난 4일 진행된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IRA 법안은 미 행정부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처리했다”며 “워싱턴 사정을 가장 소상히 보도하는 폴리티코에서도 최고의 기밀(best kept secret)로 보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요 기업의 미국 로비 규모

주요 기업의 미국 로비 규모

미국의 대중 견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점도 한국 기업들이 미국 사정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하는 요소다. 예컨대 반도체 업계만 하더라도 1년간 유예 판정을 받아 시간을 벌긴 했지만, 결국은 관련 규제가 적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안과 우시 등 중국 공장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은 추가 투자를 고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도 “개인적인 추정이지만, 삼성전자는 시안 낸드플래시 공장을 마지막으로 추가 증설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한국 업체들로서는 추가 유예가 절실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컨설팅업체 욜인텔리전스에 따르면 SK하이닉스 D램 생산량의 50%가량이 중국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낸드플래시 메모리에서는 SK하이닉스가 낸드 웨이퍼 생산량의 25%, 삼성전자는 낸드 웨이퍼 생산량의 38%를 중국 공장에 기대고 있는 상황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1년 뒤 미국 정부가 또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시간을 번 만큼 미국 정부의 향방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국 기업, 사업 중심 미국 이동 우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종국에는 한국 기업들의 사업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을 미·중 전쟁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양향자 의원(국회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간담회를 통해 “미국이 반도체 생산기지를 국내로 옮기려는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며 “우리는 미·중 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한·미 전쟁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국내 그룹 총수들에게 연락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질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터라 기업들 입장에선 당분간 미국 내 정보획득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효영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계속해서 시장에 장벽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고, 미국 정부를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며 “진통이 있겠지만 당분간 적응의 기간을 갖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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