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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변양균 말대로 하라'…盧 대통령, 전 부처 핵심 불러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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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2〉 재원 배분의 틀을 바꾸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5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5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2003년 3월, 기획예산처 차관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이광재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에게서 깜짝 놀랄 만한 연락을 받았다. “전 부처 기획관리실장을 인솔해 청와대로 들어오세요.” 공직사회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지시인지 이해할 거다. 기획관리실장은 각 부처의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자리다. 다른 부처 차관이 오라가라 할 만큼 만만한 자리가 결코 아니다.

나는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대강 짐작은 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기획관리실장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노 대통령으로선 ‘앞으로 변양균 차관이 재정개혁을 주도할 건데 각 부처는 그 말을 잘 들으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기획관리실장들과 오찬을 하면서 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재정개혁’을 강력히 당부했다. 참석자 중에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보니 대통령 메시지를 잘 알아들은 사람은 차관도 되고 공직생활에서 대체로 잘 풀렸다.

‘상피제’ 관행 깨고 파격 차관 인사
힘없는 서민 위한 재정 개혁 시동
“배석자 없이 장관만 회의에 오라”
선진국 모델 재원배분회의 개최

‘톱다운’ 방식의 재정개혁은 노 대통령 취임 전부터 얘기가 돼 있었다. 처음엔 나에게 차관을 건너뛰고 바로 장관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서열과 관례를 중시하는 관료 사회에서 제대로 일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상피제’라는 게 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이 동시에 장관과 차관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첫 기획예산처 장관(박봉흠)은 PK(부산·경남), 나도 PK였다. 그래서 건설교통부 차관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정식 발표(2003년 3월 3일)를 하루 앞두고 준비하라는 통보도 받았다. 막상 인사 명단을 보니 뜻밖이었다. 기획예산처 차관에 내 이름이 있었다.

시간이 지난 뒤 노무현 정부의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희상 전 국회의장에게서 사정 얘기를 들었다. 그는 상피제를 들어 나를 기획예산처 차관에 임명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했다고 한다. “내가 특별히 시킬 일이 있으니 상피제에 상관없이 하시죠.”

대통령 철학 반영한 ‘톱다운’ 예산편성

2005년 4월 30일 경기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제1회 국무위원 재원배분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오영교 행정자치부 장관, 김승규 법무부 장관, 오명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 이해찬 국무총리. 사진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2005년 4월 30일 경기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제1회 국무위원 재원배분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오영교 행정자치부 장관, 김승규 법무부 장관, 오명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 이해찬 국무총리. 사진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정권 초기에 벌어진 이런 일들은 노 대통령이 재정개혁에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노 대통령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했다. 대통령이 됐다고 단숨에 이들의 생활을 바꿔줄 수는 없었다. 우선 돈이 있어야 했다. 더 중요한 건 이 돈을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맞춰 제대로 쓸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정말 국민을 위한 재정을 쓰려면 반드시 톱다운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내가 노 대통령 취임 전부터 드린 말씀이었다.

톱다운이라고 하면 왠지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즉 하향식으로 내려간다는 단어의 의미 때문이다.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바텀업’이 민주적인 게 아니냐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다. 실상은 정반대다. 정부 예산 편성에서 바텀업은 한마디로 전년도 답습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년도 예산을 기초로 왕창 깎고 나서 항목별로 조금씩 보태는 방식으로 예산을 짠다.

톱다운은 먼저 큰 틀에서 쓸 돈을 정해 놓는다. 우리 용어로는 ‘총액배분 자율편성제도’라고 한다. 분야별로 예산 총액을 배분한 뒤 세부 항목은 각 부처 자율에 맡긴다. 이렇게 해야 전년도 답습주의를 버리고 대통령 국정 철학을 반영해 재원 배분의 틀을 바꿀 수 있다.

톱다운 예산편성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예산실 내부에서도 일찌감치 논의가 있었다. 나는 서강대 박사 학위 논문(‘한국 재정의 지속가능성 분석과 재원 배분의 비최적성 치유에 관한 연구’)에서 자세한 연구 내용을 담았다. 책에서 배운 걸 현실에 적용하자니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스웨덴서 배운 ‘완전 비공개’ 원칙

2004년 2월 필자가 기획예산처 차관 시절에 작성한 ‘국가 재원배분 개혁’ 보고서 표지.

2004년 2월 필자가 기획예산처 차관 시절에 작성한 ‘국가 재원배분 개혁’ 보고서 표지.

2003년 8월 특별 출장팀을 꾸려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찾아갔다. 북유럽 선진국에서 톱다운 예산편성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박수민 서기관, 고영선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가 동행했다. 스웨덴 재무부에서 첫날 미팅은 실망스러웠다. 모든 장관이 참여하는 재원배분회의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묻고 또 물었지만 속 시원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시간만 흘렀다. 스웨덴 재무부 담당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배우러 오신 게 맞습니까.” 미팅이 길어지면 관광할 시간이 줄어드는데 괜찮겠냐는 얘기였다. 그동안 한국 사람들이 스웨덴에 어떤 인상을 심어줬는지 알만했다. 나는 분명히 말해줬다. “우리는 관광하러 온 게 아니라 진짜 배우러 왔습니다.”

스웨덴 담당자가 양해를 구했다. 한국으로 치면 예산총괄국장쯤 되는 사람이 얼마 전 퇴직했는데 그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했다. 다음날 그 사람에게서 들은 설명은 이랬다. 장관들은 외부 접근을 차단한 섬이나 교외에 모인다. 보통은 1박 2일, 경우에 따라선 2박 3일 격렬하게 토론을 벌인다. 장관 수행원이나 배석자가 전혀 없다는 점도 특이했다. 토론 내용은 일체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완전 비공개.’ 이게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국가 재원을 배분하다 보면 양보와 타협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 사실이 외부로 나가면 정치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농림부 장관이 축산 예산 감축에 동의했는데 그게 알려졌다고 치자. 그 장관은 축산업계에서 거센 항의를 받는 건 물론 정치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다.

그래도 궁금증이 남았다. 배석자 없이 장관들만 와도 참석자가 한두 명이 아니다.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게 가능할까. 전직 스웨덴 예산국장의 답변은 간단했다. ‘퍼머넌트 콘피덴셜(Permanent Confidential)’, 즉 영구 비밀이란 얘기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도 그게 어떻게 비밀이 유지됩니까.”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구 비밀이라니까요.” 스웨덴은 누구라도 비밀을 누설하면 법적 처벌을 받을 뿐 아니라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는 사회였다. 노르웨이에 가서 들은 얘기도 스웨덴과 비슷했다.

우여곡절 많았던 재원배분회의

귀국 후 노 대통령에게 쭉 보고했다. 이듬해인 2004년부터 우리도 해보자고 했다. 각 부처에 재원배분회의를 한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3월이 되자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생겼다.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초유의 사태다. 노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았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비전을 담은 중장기 계획을 대통령 주재 회의를 거치지 않고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4월 말에 계획했던 재원배분회의는 취소했다.

첫 회의는 탄핵 정국 종료 후인 2004년 6월 19일 토요일에 열렸다. 정식 명칭은 ‘2004~2008년 국가재정 운용계획 수립을 위한 토론회’였다. 회의를 준비하며 각 부처에서 난리가 났다. 장관이 회의에 가는데 배석자가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였다. “아무리 장관이지만 부처 예산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이렇게 하소연하는 곳이 많았다. 나는 속으로 ‘자기 부처 예산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장관을 한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회의를 시작했지만 선진국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의원내각제에선 총리와 장관이 어느 정도 수평적인 관계다. 그런데 대통령과 장관은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노 대통령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모든 부처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었다. 토론이 약간 형식적으로 흘렀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식으로 국무위원 재원배분회의라는 이름을 붙인 건 2005년이 처음이다. 내가 기획예산처 장관을 맡은 뒤다. 경기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주말(4월 30일~5월 1일)에 1박 2일 일정으로 했다. 회의 자료는 미리 참석자들에게 나눠줬다. 장관들은 과외 공부하듯 열심히 준비해서 참석했다. 다만 대통령까지 함께 숙박하는 건 경호실에서 난색을 보였다. 노 대통령은 첫날 밤 청와대에 돌아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왔다.

이런 식의 국무위원 재원배분회의는 200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이름도 재정전략회의로 변경되고 톱다운 제도도 유명무실해졌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재정개혁을 향한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는 생각이었다. 더욱 어렵고 중요한 숙제가 남아있었다. 앞으로 10년, 20년, 더 나아가 30년 정도 나라가 쓸 돈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는 일이었다. 국가 재정의 작동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선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