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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내게 돈이 많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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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세상을 바꾸고 싶을 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내게 돈이 좀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과하게 비싼 소고기를 볼 때 그렇다. 비싼 자료를 발견했을 때 그렇다. 누군가 딱한 처지에 놓였을 때 그렇다. 연구비 확보가 난망할 때 그렇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발견했을 때 그렇다.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려 할 때 그렇다. 학생들과 답사를 하러 갈 때도 그렇다. 학생들과 답사를 떠날 때면, 어쩌면 이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답사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좋은 곳에 묵으며, 좋은 것을 경험하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좀 더 풍부한 재원이 있으면 좋으련만. 재원이 풍부하면, 학생들 자력으로 가기 어려운 곳까지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여행을 꿈꾸지 않는 한, 천문학적 액수의 답사비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간 여윳돈이 생긴다면, 꿈만 꾸던 이탈리아 답사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큰돈이 생긴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 경제가 한창 호황일 때, 배우이자 영화감독이었던 기타노 다케시는 돈을 너무 많이 번 나머지 이 돈을 다 쓰고나 죽을 수 있을까 겁이 덜컥 났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로또에 당첨되면 자칫 패가망신한다고 하지 않나. 돈 버는 일만큼이나 돈 쓰는 일도 쉽지 않은 법. 세상의 재력가들은 돈을 잘 쓸 역량이 있는 것일까. 난 돈을 잘 쓸 역량이 있는 것일까.

저출산, 입시 과열…다수의 합리적 행동의 결과
강제, 계몽의 방식은 저항과 탈퇴의 ‘비용’ 유발
지금과 다르게 사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때
미래의 한국인, 새로운 미래가 출현할 수 있어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호젓한 곳으로 답사를 가면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밤은 제법 깊었으나 잠자리에 들기는 싫고, 누군가 대화의 정적을 틈타 맥락 없이 질문을 던지는 거다.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들어보았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질문들. 언젠가 학생들과 제주도 답사를 갔을 때, 한 학생이 그런 질문을 내게 던진 적이 있다.

“선생님, 수백억, 수천조, 하여튼 엄청난 돈이 생긴다면 뭘 하실래요?”

“그런 일 안 생겨요.”

“에이. 그냥 한번 생각해보세요. 선생님에게 개인이 쓰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돈이 생기면 뭘 하실래요?”

“사람들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데 쓰겠어요.”

이 무슨 당치 않은 발언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겠다니. 그것도 돈으로 바꾸겠다니. 당장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들은 현실을 바꾸겠다는 꿈을 꾼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싶다는 말이다. 개혁가들의 과제는 결국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문제로 수렴되곤 한다. 그 엄청난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날 밤 내게 저 질문을 던진 학생은 춤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학부 시절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한때 극단에서 경력을 쌓아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언젠가 종강 파티에서 멋진 춤사위를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학생에게 청한 적이 있다. 춤 한번 보여줄 수 있느냐고.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부끄러워서일까, 춤 실력이 녹슨 것일까, 아니면 선생은 관객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이 싫다면 어쩔 도리 없다. 당연히 기대를 접어야 한다. 만약 어떤 이유에선가 기어이 그 학생의 춤을 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의 행동을 바꿀 방법은 강제, 계몽, 인센티브 중 하나다. 권력을 사용해서 특정 행동을 억지로 하게 만드는 것이 강제다. 의식화를 통해서 특정 행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게끔 하는 것이 계몽이다. 특정 행동을 부추기는 자극을 제공하는 것이 인센티브다.

자, 그럼 춤추라고 그 학생을 강제해볼까. 그 학생에게 강제는 통하지 않는다. 좋은 말 할 때 나가서 춤추라고 위협한다고 해서 춤을 추겠는가. 웃기지 말라고 대꾸할 것이다. 설령 강제로 춤을 추게 한들, 그 춤이 볼만하지도 않을 것이다. 강제가 불가능하다면, 계몽을 시도해볼까.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설득해보는 거다. 댄스는 현대판 삼강오륜에 속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보는 거다. 그런 윤리적 계몽을 한다고 해서 춤을 추겠는가. 어설픈 계몽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그는 충분히 총명하다. 강제와 계몽이 불가능한 이상, 남은 방법은 인센티브뿐이다. 예컨대 춤을 추면 1억원을 주겠다고 해보는 거다. 그러면 추기 싫은 춤도 추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까짓거 한 5분 춤추고, 1억원의 고액 출연료를 챙기는 거지 뭐. 이처럼 고액의 인센티브는 특정 행동을 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 학생은 꽤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이 방법은 통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내가 돈이 없어서 시도를 못 할 뿐.

강제든, 계몽이든, 인센티브든 어떤 조처에 대한 방식으로는 저항, 탈퇴, 감내가 있다. 나가서 춤을 추라고요? 웃기지 마세요.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저항”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는 학교에 다닐 필요를 못 느끼겠군요. 자퇴합니다! 이것이 “탈퇴”다. 정치이론가 앨버트 허쉬만이 말했듯이, 저항이나 탈퇴는 큰 “비용”이 든다. 저항을 하면, 상대는 반격을 하려 들 것이기에. 탈퇴를 하면, 그간 투자한 시간과 노력과 돈을 잃게 될 것이기에. “손절”이 어디 쉬운가. 이런저런 고민 끝에 에잇, 까짓 춤 한번 춰주고 말지, 라고 결심하면 그것은 “감내”다.

한국 사회는 꾸준히 강제에 의존해 왔다. 막대한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형무소, 크고 작은 벌칙, 횡행했던 고문과 구타는 모두 한국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해 온 강제를 증명한다. 강제에 의존한다는 것은, 형벌과 같은 조치를 통해 사람들의 행태를 개선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강제는 얼마나 성공했을까. 여전히 같은 종류의 범죄가 빈발하는 것을 보면, 강제는 크게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강제를 꿈꾼다. 그런 ××들은 감옥에 처넣어야 해! 강제 프로젝트의 집행을 위한 비용은 비싸다. 계속 법을 만들어야 하고, 감옥을 지어야 하고, 잡아들여야 하며, 위협해야 하고, 위협이 공갈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꾸준히 계몽에 의존해 왔다. 너도나도 외쳐왔다. 정신 차려! 머리에 힘줘! 운동권의 의식화 프로젝트는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계몽 프로젝트 중 하나다. 계몽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식을 바꾸어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깨치지 못해서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피계몽자에 대한 계몽자의 도덕적 우위를 전제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계몽은 얼마나 성공했을까. 사람들은 계몽 당하기 싫어한다. 계몽 당한다는 것은 자기 의식의 열악함을 인정하는 일이니까. 그 와중에 계몽을 외쳤던 이들의 위선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국 사회는 꾸준히 인센티브에 의존해 왔다. 다양한 장려금, 보너스, 포상이 모두 인센티브다. 최근에도 인구감소를 억지하기 위해서 수백 조 원의 출산장려 예산을 써왔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인센티브의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잘못하거나 무지몽매해서 도달한 결과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결과 오늘날 한국 사회가 출현했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특징들, 이를테면 저출산, 부동산 투기, 입시 과열, 수도권 집중이 걱정인가? 그것들 역시 사람들이 잘못하거나 무지몽매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나름) 합리적 행동이 낳은 현상이다.

저출산, 부동산 투기, 입시 과열, 수도권 집중을 범죄처럼 여기는 이들은 사람들을 강제해서 그 현상을 불식하려 들 것이다. 각종 형벌을 입법화하고, 어기는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저출산, 부동산 투기, 입시 과열, 수도권 집중을 몽매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사람들을 계몽해서 그 현상을 불식하려 들 것이다. 각종 도덕적 언설을 남발하며, 어기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낙인을 찍을 것이다. 아이를 안 낳겠다니, 그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라구!

저출산이든, 부동산 투기든, 입시 과열이든, 수도권 집중이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다수가 느꼈기에 거대한 사회 현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는 게 합리적이었기에, 그렇게 사는 한국인이 탄생했고, 그런 한국인이 다수가 되었을 때 그런 한국 사회가 출현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과 다르게 사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때, 비로소 미래의 한국인이 출현하고, 그런 한국인이 다수가 될 때 한국의 새로운 미래가 출현하겠지. 그렇다면 개혁가는 강제나 계몽보다는 합리성의 조건을 바꾸는 데 더 부심해야 하지 않을까. 내게 돈이 많다면, 강제나 계몽보다는 합리성을 재정의하는 데 쓰겠다. 지금과 달리 행동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게끔 삶의 조건을 조정하는 데 쓰겠다. 그러나 내게 그럴 돈은 없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