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성운 문화팀 기자
1세대 아이돌이 여전히 활동하던 2000년대 전반에는 팬덤 간에 컬러 신경전이 치열했다. 당시엔 팬덤마다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을 상징하는 컬러 풍선을 들고 흔드는 것으로 세를 과시하곤 했다. 컬러가 겹친다는 건 일종의 ‘구역 침범’으로 여겨져 양측 팬덤의 갈등으로 번졌다.
대표적인 것이 걸그룹 핑클과 보이그룹 동방신기 팬덤 간의 ‘펄레드 전쟁’이다. 공교롭게도 두 팬덤이 펄레드를 고유 컬러로 지정하면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당시 이들의 전쟁은 언론에서 기현상처럼 다뤄지곤 했다. 이것이 해소된 것은 응원봉이 등장하면서다. 2000년대 중반 빅뱅 측에서 LED를 이용한 응원봉을 활용하자, 각 팬덤에서도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응원봉은 풍선과 달리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다 보니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며칠 전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한류’ 특별전을 보러 갔을 때다. 한복의 아름다움이나 ‘오징어 게임’ 등을 내세우는 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외국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응원봉이었다. 에스파·트와이스·빅뱅·블랙핑크 등 K팝을 대표하는 20여개 그룹의 응원봉이 자세한 해설과 함께 걸려 있었다. 외국인들은 고대 유물을 바라보듯 눈을 떼지 못했다. 한때 소수의 하위문화로 구박받던 그 시절 10대 팬들의 팬덤 도구는 이제 명실상부 K팝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한 시대의 문화는 간혹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거장의 작품보다 이처럼 민간의 희로애락이 녹아든 물건에서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