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응원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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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1세대 아이돌이 여전히 활동하던 2000년대 전반에는 팬덤 간에 컬러 신경전이 치열했다. 당시엔 팬덤마다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을 상징하는 컬러 풍선을 들고 흔드는 것으로 세를 과시하곤 했다. 컬러가 겹친다는 건 일종의 ‘구역 침범’으로 여겨져 양측 팬덤의 갈등으로 번졌다.

대표적인 것이 걸그룹 핑클과 보이그룹 동방신기 팬덤 간의 ‘펄레드 전쟁’이다. 공교롭게도 두 팬덤이 펄레드를 고유 컬러로 지정하면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당시 이들의 전쟁은 언론에서 기현상처럼 다뤄지곤 했다. 이것이 해소된 것은 응원봉이 등장하면서다. 2000년대 중반 빅뱅 측에서 LED를 이용한 응원봉을 활용하자, 각 팬덤에서도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응원봉은 풍선과 달리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다 보니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며칠 전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한류’ 특별전을 보러 갔을 때다. 한복의 아름다움이나 ‘오징어 게임’ 등을 내세우는 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외국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응원봉이었다. 에스파·트와이스·빅뱅·블랙핑크 등 K팝을 대표하는 20여개 그룹의 응원봉이 자세한 해설과 함께 걸려 있었다. 외국인들은 고대 유물을 바라보듯 눈을 떼지 못했다. 한때 소수의 하위문화로 구박받던 그 시절 10대 팬들의 팬덤 도구는 이제 명실상부 K팝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한 시대의 문화는 간혹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거장의 작품보다 이처럼 민간의 희로애락이 녹아든 물건에서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