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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학교 다닝께, LG가 보이더라"...까막눈 할매 시인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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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가 가면 무조건 빈 택시인 줄 알고 손만 들고 있응께 안 태워 줘. 그란디 1년 학교 다닝께 빈 차라고 딱 써진 것을 알겠더라.”

 광주희망학교 문해교육 교실에서 공부하는 양부님(77)씨가 칠판 앞에서 글을 쓰고 있다. 사진 광주희망학교

광주희망학교 문해교육 교실에서 공부하는 양부님(77)씨가 칠판 앞에서 글을 쓰고 있다. 사진 광주희망학교

광주광역시에 사는 양부님(76)씨는 한글을 몰라 택시의 ‘빈 차’ 표시를 읽지 못했다. 일흔이 넘어 한글을 배우고 나서야 택시가 안 태워주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표시들이 글자로 눈에 들어오는 놀라운 경험을 시로 썼다. 제목은 '나만 몰랐던 세상'.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지난달 양씨와 같은 늦깎이 학습자들이 쓴 시 100편을 엮은 시집 '일흔살 1학년'을 펴냈다. 이 책의 엮은이로 참여한 나태주 시인은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운 분들이 쓴 시에서 우리의 시가 가야 할 곳을 봤다”며 “시를 읽는 동안 옷깃을 여몄다”고 했다.

성인 비문해자 200만명…어린 시절 배움 기회 놓쳐

양부님(77)씨가 쓴 시 '나만 몰랐던 세상'. 광주희망학교 제공

양부님(77)씨가 쓴 시 '나만 몰랐던 세상'. 광주희망학교 제공

제576돌 한글날을 맞는 지금 우리나라는 '완전 취학'에 가까울만큼 대부분이 학교 교육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성인 비문해자는 200만명이 넘는다. 주로 60대 이상 고령 취약계층 여성들이다.

양씨는 어린 시절 가난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 1946년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4살 땐 어머니마저 잃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아기 돌보는 일을 했다. 스무살이 돼 결혼을 하고 나서는 농사일하랴 집안일 하랴 가난에 치여 공부는 생각도 못 했다고 했다.

“7살 때 동네에서 야학인가 한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호롱불 쓰고 ‘가’자를 쓰더라고요. ‘가’자를 한 번 딱 그리니까 고모가 ‘이 X아 뭐하러 왔냐’고 목구녕을 잡아다가 탁 밀어부더라고. 그때 쫓겨나갖고 시방도 내가 ‘가’자는 엄청 잘 알아요. 그때 고모가 야학 하게만 놔뒀어도 내가 글씨를 좀 잘 알 것인디….”

새벽에도 글 공부…“내 책 내는 게 꿈”

양부님(77)씨가 백일장 등에서 받은 상장들. 광주희망학교 제공

양부님(77)씨가 백일장 등에서 받은 상장들. 광주희망학교 제공

양씨는 지난 2019년 친구의 소개로 광주희망학교를 찾았다. 학교를 다닌 3년 간 양씨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넘어 백일장, 시화전 등에서 세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일상에서 겪은 일, 학교를 오가면서 보는 것들이 시의 재료가 된다. 지난달에는 ‘나만 몰랐던 세상’으로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글아름상을 받으러 시상식도 다녀왔다. 그는 “다 내 내용이야. 내 사정에 있던 일 그대로 써볼라요 그랬어. 상을 받으니 내가 참 훌륭한 사람이 되었구나 싶어서 눈물을 닦았어요. 내가 너무 보람지고 내가 값진 사람이다 싶어서…”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3년간 양씨를 가르친 윤인자 강사는 “일기 쓰기 숙제를 내주면 3장이고 5장이고 써오신다. 틀린 걸 빨간 글씨로 고쳐드리면 그걸 또다시 써오신다”고 했다. 또 “새벽 2시에 일어나서 5시까지 공부하신다고 한다. 새벽에 물어보는 문자가 와 있는 적도 있다”고 했다. 윤 강사는 “어머님들 열정을 보면서 '나도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내가 배우는 셈”이라고 말했다.

양씨는 한글을 만난 뒤 “일흔 나이에도 내가 커졌다”고 말했다. 예전엔 은행에 가도 직원에게 매번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해야 했지만 이제는 길거리 간판도 읽고, 냉장고에 넣는 재료에 메모도 쓸 수 있어서 “기분이 째지게 좋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꿈도 사치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쓰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나는 공부 좀 열심히 해갖고 온 세계에다 책을 한번 내고 싶어요. 내 살았던 얘기 좀 쓰고 싶어요. 아기 때 부모 잃고 구박당하고 눈물로 서러운 세상을 살았던 거. 내 소원은 다른 거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조목조목 써서 이런 사람이 이렇게 고생을 했다. 이렇게 변했더란다, 그게 내 소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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