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0년대 경험 쓴 90년대 작품, 2020년대에도 통한다…노벨문학상 아니 에르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니 에르노. 사진 문학동네

아니 에르노. 사진 문학동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솔직한 사랑, 욕망의 보편성 #감정 해부하듯 냉철한 표현

사랑에 빠진 사람의 평범한 독백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독한' 내용으로 1991년 발표 당시 프랑스 사회에 큰 파장을 불렀던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82)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의 일부다. 유명 문학교수와 외국인 유부남과의 불륜이라는 파격적인 소재, 실제 경험에 기반한 듯한 실감과 선정적인 표현 수위 때문이었다.

올해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은 또다시 여성이었다. 2018년 미투 파문으로 실추된 명예를 정치적 올바름으로 극복하기라도 하려는 듯 또다시 여성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겼다. 2020년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 이후 2년 만이다.

6일(현지시간) 전 세계에 스트리밍 생중계된 유튜브 발표에서 한림원은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 있게, 임상적 예리함으로 탐구했다"고 선정 사유를 밝혔다. 에르노는 한 스웨덴 언론과 인터뷰에서 "큰 영예인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삶이 곧 작품이 된 작가… '허구를 쓴 적 없다'

수상자 발표 직후 이어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한림원 관계자는 에르노가 "좁은 의미의 허구(fiction)를 넘어 문학의 경계를 넓히는 야심적인 기억 프로젝트를 선보였다"고 소개했다. 파격적인 그의 소설 소재가 실제 경험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에르노의 문학은 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체험을 고스란히 옮기는 오토 픽션 작가로 분류될 정도다. 1940년 프랑스 노르망디 소도시에서 태어난 에르노는 대학 졸업 뒤 교직 생활을 하던 중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장롱』으로 등단했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기규정처럼 자전적·전기적·사회학적인 작품을 선보여 왔다.

60년대 본인의 낙태 경험을 토대로 2000년 『사건』을 펴냈고, 2016년작 『소녀의 기억』에서는 열여덟 살 때 숲속 여름학교에서의 첫 성 경험을 "다른 어떤 기억보다 훨씬 선명하고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는 수치스러운 기억"이라고 표현하며 60년 세월을 건너뛰어 재현하기도 했다.

숭실대 불문과 이재룡 교수는 에르노의 세계에 대해 "절정을 향해 치닫는 구조의 통상적 소설과 다르게, 내가 겪은 진실 외에는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문학의 범위를 확장한다"며 "그 과정에서 계급적 통찰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람의 겪을 수 있는 큰일이 가족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품 세계가 단조로운 측면이 있다”고 평했다.

'칼같은 글쓰기', '민속학자'라 스스로 부른 작가

그의 가장 최근 작품은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48쪽 분량의 『젊은이』다. 작가가 30대 시절로 돌아가서 사랑을 하는 이야기지만, 사회학적 시선과 계급문제에 대한 고찰이 스며들어 있는 작품이다.

『집착』『카사노바 호텔』 등을 국내에 번역한 정혜용씨는 "『한 여자』를 가장 좋아하는데, 모녀의 관계를 건조한 문체로 다루면서도, 마음을 탁 치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비가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파고들어 간 『자리』(1984)로 첫 문학상인 르도노상을 받았고, 2008년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상, 프랑수아 모리아크 상, 텔레그람 독자상 등을 수상했다. 2003년 그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2011년 선집 『삶을 쓰다』가 생존 작가로는 최초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됐다.

2022년에도 통하는 보편성… 부국제에서 다큐로 등장

아니 에르노가 가족과 함께 찍은 홈 비디오를 모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 에이트 시절'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에 등장한다. 아니 에르노가 직접 내레이션을 입혔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아니 에르노가 가족과 함께 찍은 홈 비디오를 모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 에이트 시절'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에 등장한다. 아니 에르노가 직접 내레이션을 입혔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한림원이 "수상작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아르노의 문학은 모두를 위한 문학"이라고 밝혔듯 아르노의 솔직함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60~70년대의 경험을 되살려 90년대에 쓴 작품들이 2020년대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1991년작 『단순한 열정』은 2020년 영화화됐고, 2000년 작품 『사건』을 영화화한 '레벤느망'은 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단 만장일치로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1972~1981년에 걸쳐 가족과 찍은 홈비디오를 엮은 다큐멘터리 '슈퍼 에이트 시절'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에도 만나볼 수 있다. 그의 전남편 필립 에르노가 슈퍼 8 카메라로 찍고, 아들 다비드 에르노 브리오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다. 에르노는 내레이션을 맡았다. 이에 대해 에르노는 “한 가족의 아카이브일 뿐 아니라 여가 생활, 삶의 방식, 중산층의 꿈 등에 대한 증언”이라고 소개했다.

김정연·민경원·남수현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