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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전도사’ 양향자의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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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입지전적 인물인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본래 낙관주의자다. 석·박사 인력이 즐비한 반도체 회사에 고졸 사원으로 입사했을 때도 미래를 낙관했고, 주경야독 끝에 ‘여상(女商) 출신 첫 임원’이 됐다. 입사 초 회사의 전사적 투자와 엔지니어들의 열정을 믿으며 반도체로 일본을 따라잡을 거라 자신했던 것도 현실이 됐다.

그런 양 의원이 자신은 이제 더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졌고 대한민국의 미래 역시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다. 세계가 반도체 영토 확보에 목숨을 걸고 벌이는 전쟁을 목도하며 느끼는 심각한 위기의식이다.

열강들, 반도체 패권 전쟁중인데
‘K칩스법’은 정쟁에 밀려 뒷전
속히 법안 처리하고 국회 기구 둬야

규소라는 광물 위에 미세한 소자와 금속을 잔뜩 쌓은 물질. 반도체는 PC와 모바일, 가전제품,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거의 모든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됐다. 반도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전쟁 후 잿더미에서 변변한 산업 인프라 없이 일어선 한국을 첨단 IT 국가로 바꿔놓은 것도 반도체 덕분이다.

손톱만 한 크기에 지나지 않은 이 반도체는 21세기 들어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 ‘죽고 사는’ 문제가 됐다. 통찰력 있는 경영학자 스티브 블랭크 미 컬럼비아대 교수가 한 “21세기의 반도체는 지난 세기의 석유와 같다.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경제력·군사력을 좌우할 것”이란 경고는 과언이 아니다.

양향자 의원(무소속)이 지난달 28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미국 주도 공급망 재편과 한국의 과제’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양향자 의원(무소속)이 지난달 28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미국 주도 공급망 재편과 한국의 과제’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미국은 반도체 패권 확보에 이미 사활을 걸었다. 반도체 설계는 미국, 소재·부품은 일본, 장비는 유럽, 위탁 생산은 한국·대만이라는 글로벌 분업 공식을 흔들고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다. 지난 5월 20일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만찬 등 통상 일정을 뒤로 하고 비행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맨 먼저 찾은 게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인 경기도 평택 캠퍼스란 점이 많은 걸 시사한다. 미국은 천문학적 규모의 실탄도 마련해놓고 있다. 8월 9일 공포된 ‘반도체산업 육성법’은 자국 반도체 기술 및 산업 발전을 위해 28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고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25%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도체를 무기화하려는 미국에 맞서 중국도 2025년까지 자국에서 소비되는 반도체의 70%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반도체 굴기(崛起) 2025’ 프로젝트 아래 국가 차원에서 약 200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한다.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 세계 1위 기업 TSMC에 쏟는 대만 정부의 애정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지난해 대만에 가뭄이 들자 하루 약 16만t의 물을 쓰는 TSMC에 농업용수를 먼저 제공하지 않았던가. 일본도 첨단 반도체 생산공장 투자에 7740억엔의 직접보조금을 편성해뒀다.

한국은 어떤가. 낙관주의자였던 양향자 의원의 걱정이 커진 이유 중 하나는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돼 정치인으로 변모한 이후 6년 동안 “반도체가 위험하다”고 한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민주당 소속 시절 국회의원 300명 중 ‘반도체 전도사’ 역할을 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의원 단체채팅방에 반도체 위기론을 꾸준히 설파했지만 “대기업 특혜는 안 된다”와 같은 당파적 논리에 묻히기 일쑤였다고 한다. 국무위원을 상대로 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반도체 전쟁의 정부 컨트롤타워가 누구냐”는 물음에 뚜렷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상황은 무소속 양 의원이 여당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으로 ‘영입’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반도체 산업 보호와 육성을 위해 양 의원이 주도한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이 지난 8월 4일 발의됐지만, 여야 정쟁과 정치권의 위기불감증 탓에 뒷전으로 밀려 있다. 수도권 대학 반도체 학과 정원을 늘려달라는 업계의 오랜 목소리도 국회의 벽을 못 넘고 있다. 여당의 반도체특위를 넘어 국회 차원의 기구 상설화가 필요하지만, 논의는 정치 싸움에 파묻혀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양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얼마 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이라는 신기술을 갖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조정은 무능했고 당파 싸움에만 혈안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에서 선두를 다투는 기술 딱 하나, 반도체를 놓고 열강이 전쟁을 벌이는 중인데 우리 정치권은 너무 태평하고 서로 싸움질만 하는 거 같아 묘하게 겹쳐 보이더라고요.”

여야는 속히 K칩스법 처리와 반도체특위의 국회 상설화를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