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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보다 생생”…울돌목서 13척 vs 133척  ‘CG 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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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오후 7시 전남 진도군 울돌목 앞 명량대첩축제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개막행사 때 열린 미디어 명량해전을 지켜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30일 오후 7시 전남 진도군 울돌목 앞 명량대첩축제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개막행사 때 열린 미디어 명량해전을 지켜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사죄는 고통 입은 이가 ‘이제 그만해도 됩니다’고 말할 때까지 해야 합니다.”

지난달 24일 오전 10시쯤 전남 진도군 고군면. 왜덕산(倭德山)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한 말이다. 그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지속적인 사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왜덕산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일본이 한때 한국에 아주 큰 고난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라며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왜덕산은 조선 백성이 명량해전 때 목숨을 잃은 왜군 수군 시신을 매장해준 곳이다. ‘왜인들에게 덕을 베풀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추모사를 통해 “425년 전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 수군들을 진도 주민들이 묻어줬다”며 “생명 앞에서는 적도 아군도 없이 맞아준 사실을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왜덕산 무덤은 1597년 9월 16일 치러진 명량해전 직후 만들어졌다. 숨진 왜군 시신을 진도 백성들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줬다. 당시 주민들은 왜군 시신이 해안가로 떠밀려오자 ‘시체는 적이 아니다’ 라며 무덤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진도문화원 등에 따르면 조성 당시 왜군 무덤 100여기 중 50기 정도가 왜덕산 자락에 남아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위령제를 통해 일본 측의 사죄를 거듭 촉구했다. “임진왜란·정묘호란 때 일본 병사들은 큰 공을 세워보겠다고 이 땅(조선) 조상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앞서 그는 지난해 11월 8일 일본 오카야마(岡山)현에 있는 한 이총(耳塚, 귀 무덤) 앞에서 사죄의 뜻을 밝힌 바 있어 이날 추모사에도 관심이 쏠렸다. 위령제 당시 그는 임진왜란 당시 숨진 조선인 넋을 기리며 일본 측의 무한 책임을 강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행한 잔혹한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이총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베어 간 조선군과 백성의 귀를 매장한 곳이다. 훗날 귀와 함께 코까지 대거 묻은 사례가 드러나 이비총(耳鼻塚, 귀·코 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도 백성들이 명량해전 직후 해변으로 밀려온 왜군 시신을 매장해준 왜덕산. 프리랜서 장정필

진도 백성들이 명량해전 직후 해변으로 밀려온 왜군 시신을 매장해준 왜덕산. 프리랜서 장정필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진도를 찾은 자리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조선인의 귀나 코를 베어 전공을 계산했다”며 이비총에 대한 의미를 강조했다. 또 “왜덕산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한국과 일본 모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길 때 두 나라의 미래는 좀 더 밝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양국의 우호를 기대하기도 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격파한 전투다. 당시 괴멸 위기에 몰린 조선 수군은 울돌목(鬱陶項)의 빠르고 험한 물살을 이용해 대승을 거뒀다. 기적 같은 이날 승리는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을 끝내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명량해전 때 왜군들이 묻힌 왜덕산은 울돌목에서 직선거리로 10㎞가량 떨어져 있다.

전남도와 진도군, 전문가 등은 이번 하토야마 전 총리 일행의 방문이 의미가 크다는 반응이다. 한·일 간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한·일 평화 교류가 적극 추진될 수 있는 물꼬를 텄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영록 전남지사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공식적인 사과를 계기로 일본은 과거 자국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한·일 양국 간 화해와 공존의 분위기를 확대 조성하는 기회를 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왜덕산 인근인 울돌목에서는 명량해전을 기리는 행사도 열렸다. ‘울돌목 페스타, 명량 빛을 품다’를 주제로 지난 2일 폐막한 명량대첩축제다. 그동안 명량대첩축제는 해상전투를 어선 수십척을 동원해 바다 위에서 재현해왔다. 해전 재현 때마다 어선 60여 척에서 쏘아대는 화포와 불꽃 등이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코로나19 여파로 3년 만에 부활한 올해 행사는 최첨단 미디어 해전 재현이 도입됐다. 진도 주무대에 설치한 가로 20m 세로 5m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컴퓨터그래픽스(CG)로 제작한 명량해전의 전투 장면이 상영됐다. 드론 300여 대가 울돌목 밤 하늘을 수놓은 드론 일자진 공연과 드론 불꽃쇼 등도 해전 분위기를 띄웠다. 출정식 후에는 케이팝 밴드인 ‘이날치 밴드’의 축하공연과 스토리를 담은 폭죽쇼 등이 이어졌다.

축제 기간 해남 우수영관광지와 진도 녹진관광지 등에서는 다양한 행사도 열렸다. 강강술래 한마당 경연대회, 청소년 가요제, 명량 트롯 축하쇼 등과 함께 수군놀이 체험, 조선 저잣거리 체험 등이다.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명량해상케이블카를 비롯해 진도와 해남 지역의 관광 명소에도 관광객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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