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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대접 받으니 행복해" 학대 노인 옆서 11년, 미숙씨 소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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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미숙씨는 2021년 4월쯤 쉼터에 머무르던 할머니로부터 손글씨로 쓰인 감사편지를 받았다. 사진 김미숙씨

김미숙씨는 2021년 4월쯤 쉼터에 머무르던 할머니로부터 손글씨로 쓰인 감사편지를 받았다. 사진 김미숙씨

“손편지를 받은 건 처음이었어요.”

‘노인의 날’인 2일 사회복지사 김미숙(49)씨는 지난해 봄 눈물을 쏟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인천시학대피해노인전용쉼터(인천 쉼터)에서 학대 피해를 본 노인 보호 일을 할 때였다. 지난해 3월 한 70대 할머니가 인천 쉼터에 들어왔다. 입소 때부터 주위를 경계하던 노인에겐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할머니는 2020년 11월 전남의 한 학대피해노인전용쉼터에 입소했다. 남편의 폭행을 견디지 못해 전남 자택을 나와 쉼터로 간 것이다. 학대피해노인전용쉼터는 학대 피해를 봤지만 갈 곳이 없는 만 65세 이상 노인을 위한 임시 보호시설이다. 4개월 이내 체류가 원칙이지만 재학대가 발생하면 연간 최대 6개월까지 머무를 수 있다. 3개월이 지났을 무렵 할머니는 돌연 귀가하겠다고 했다. 재발 방지를 약속한 남편의 말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다시 집을 나왔다. 과거 한때 거주해 익숙했던 인천으로 향했지만 남편이 찾아올까 두려웠다고 한다. 인천에서도 할머니가 갈 곳은 쉼터뿐이었다.

김미숙(오른쪽에서 두번째)씨가 2015년 인천시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노인 부부를 위한 '꽃보다 당신'이란 행사를 열기 전 사전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김미숙씨

김미숙(오른쪽에서 두번째)씨가 2015년 인천시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노인 부부를 위한 '꽃보다 당신'이란 행사를 열기 전 사전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김미숙씨

상처투성이인 마음 탓일까, 할머니는 쉼터에서 투정과 트집을 부렸다. 김씨는 식사·미용·상담에 심혈을 기울이며 할머니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두 달이 지나 쉼터를 떠나던 날, 할머니는 김씨에게 손글씨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살아오면서 힘든 날만 있었는데 여기서 사람대접도 받고 건강해졌다.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다 보니 삶에 희망이 생겼다”는 감사 인사가 담겨있었다. 김씨는 “쉼터에 오는 어르신들은 몸과 마음을 다친 분들이 많다”며 “할머니로부터 최근 집을 구해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11년간 피해 노인 500여명 만났다

김씨는 11년 차 사회복지사다. 노인학대를 목격한 어릴 적 기억과 매주 나가던 봉사활동이 그를 사회복지사로 이끌었다. 2012년부터 인천시노인보호전문기관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인천쉼터에서 일하고 있다. 술만 마시면 때리는 남편을 피해 쉼터에 왔다가 되돌아간 뒤 재학대를 경험한 할머니, 부인에게 전 재산을 잃은 뒤 갈 곳 잃은 할아버지 등 11년간 500여건의 사연이 그를 스쳤다. 눈가가 젖는 날이 늘었지만, 학대 후유증을 이기고 일상을 되찾는 노인을 보며 힘을 얻는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김씨는 “노인학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가해자인 가족을 감싸려는 심리 때문에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서다. 보건복지부의 2021 노인학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노인학대 신고 건수는 1만9391건으로 전년 대비 14.2% 늘었다. 학대 행위자는 배우자(29.1%)가 아들(27.2%)을 처음 앞질렀다. 김씨는 “드러나지 않은 실제 학대 건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 학대를 뿌리 뽑기 위해선 피해 노인이 재학대에 빠지는 굴레를 끊어야 한다고 김씨는 강조했다. “그러려면 쉼터에 대한 지원을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다. 인천 쉼터의 경우 사회복지사 1명과 요양보호사 4명이 교대로 24시간 피해 노인 5명을 돌본다. 행정 업무도 이들 몫이다. 쉼터 입소를 기다리는 노인은 많지만, 인력과 재원 부족으로 모두를 수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노인 학대는 아동 학대보다 수가 적다 보니 관심도 덜하고 인프라가 열악해요. 본인이 거부하면 대응하기 어렵다는 법적 한계도 있고요.”

2019년 5월 김미숙(오른쪽)씨가 남편 박장선씨와 함께 인천 산곡중에서 열린 장애인 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김씨 부부는 모두 사회복지사다. 사진 김미숙씨

2019년 5월 김미숙(오른쪽)씨가 남편 박장선씨와 함께 인천 산곡중에서 열린 장애인 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김씨 부부는 모두 사회복지사다. 사진 김미숙씨

김씨는 어느덧 전국 19개 쉼터 사회복지사 중 가장 오래 현장을 지켰다. 2019년엔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했다. 업무 부담도 크고, 시설 내 학대 논란 등으로 이직하는 동료가 늘고 있어서다. 그는 마음 편히 찾을 수 있는 노인보호시설을 만드는 게 꿈이다. “남편은 발달장애인을 돌보는 사회복지사예요. 남편과 함께 노인과 발달장애인을 모두 책임지는 보호시설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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