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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달려와 정착…'캣맘'이 멸종위기 붉은여우 엄마된 사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0m가량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아 여우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요. 동화 〈어린왕자〉에 나오는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가무스름한 귀를 쫑긋 세우고 저를 쳐다보더군요. 말은 통하지 않지만 저는 여우와 교감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지난 5월 영주에서 달려온 붉은 여우

부산 해운대구에 사는 하경숙(69)씨는 달맞이고개에 서식하는 붉은여우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 여우는 지난 5월 경북 영주 소백산에서 400㎞를 달려 부산까지 온 1급 멸종위기종이다.

지난 6월 초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에서 발견된 붉은여우. 사진 독자 제공

지난 6월 초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에서 발견된 붉은여우. 사진 독자 제공

하씨는 지난 6월 초 달맞이고개에서 붉은여우를 처음 발견해 야생동물보호협회 등에 신고했다. 달맞이고개는 길이 대체로 평탄하고 해운대 바다를 조망할 수 있어 방문객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당시 여우는 이 고개에서도 가파르고 산세가 험한 돌산 구간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10년째 이 지역에 살며 매일 지정된 곳에 동네 고양이들을 위한 사료를 두는 ‘캣맘’인 하씨는 이런 여우가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하씨는 고양이 먹이통이 있는 장소에서 붉은여우를 다시 만났다. 달맞이고개에 여우 천적은 없다. 다만 번화가인 만큼 차와 사람의 통행이 잦고 여우 먹이활동에도 적절하지 않은 환경이다. 하씨는 “다가가면 자리를 피해 먼 곳에서 지켜봤다. 사료를 조금 먹다가 옆에 앉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이후 하씨는 사료와 반려동물용 참치캔 등을 더 넉넉히 준비했다. 손수 생닭을 장만해 여우가 먹을 수 있도록 놓아준 적도 있다. 그러는 동안 하씨는 여우와 가까워졌다.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마주 앉아 동화를 들려주는 하씨를 여우가 1시간 넘게 물끄러미 바라본 적도 있다고 한다. 태풍 ‘힌남노’와 ‘난마돌’ 상륙 때 걱정이 컸지만, 다행히 여우는 태풍을 무사히 넘겼다. 여전히 달맞이고개에 살고 있다.

여우 돌보던 부산엄마, 진짜 보호자 된다 

하씨는 곧 붉은여우의 정식 보호자가 된다. 3일 국립공원연구원 중부보전센터에 따르면 하씨는 붉은여우 ‘명예보호자’로 지정된다. 명예보호자 지정은 센터가 야생동물 서식지 주변 주민 등을 대상으로 지정해 야생동물 돌봄을 부탁하는 제도다. 붉은여우가 해운대로 온 뒤 관심을 두고 자주 살피던 부산야생동물보호협회 관계자 2명도 하씨와 함께 명예보호자로 지정될 예정이다.

명예보호자가 되면 활동을 위해 월 10만원의 교통비와 사료·의복 등을 지원받을 수 있다. 애초 중부보전센터는 포획을 계획했지만 붉은여우가 100일 넘는 기간 부산에 머물고 있는 데다 당분간 포획될 가능성도 낮다고 보고 명예보호자를 지정하기로 했다.

“야생성 상실 우려되지만 사실상 정착”

하씨와 함께 붉은여우를 돌본 이종남 부산야생동물보호협회 부회장은 “야생성 유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먹이활동이다. 지금 이 여우는 비록 야생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먹이활동의 대부분을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어 바람직한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하지만 붉은여우는 매우 예민하고 재빠르다. 당분간 포획이 어렵다면 명예보호자를 지정해 보살피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했다.

방사 적응 훈련중인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방사 적응 훈련중인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중부보전센터에 따르면 현재 여우는 외견상 특별한 이상이 없으며 건강하게 살고 있다. 올 겨울 여우의 생존 가능성을 묻자 이 부회장은 “개과에 속하는 붉은여우는 토굴에서 생활한다. 털은 겨울이 되면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길고 풍성해진다. 두 차례 강한 태풍을 무사히 넘길 만큼 이 지역에 적응했으며 안전한 은신처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겨울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전센터 측이 방사한 야생동물이 이탈해 다른 지역에 정착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해운대 붉은여우 사례는 향후 센터 측 야생동물 관리에 중요한 연구 케이스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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