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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초정밀 공업의 힘, 달콤쌉싸름한 유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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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호 24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레더라’ 초콜릿

질 좋은 헤이즐넛·아몬드 등의 견과류에 초콜릿 물을 부어 굳힌 ‘레더라’ 초콜릿은 내용물에 따라 표면 굴곡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진 윤광준]

질 좋은 헤이즐넛·아몬드 등의 견과류에 초콜릿 물을 부어 굳힌 ‘레더라’ 초콜릿은 내용물에 따라 표면 굴곡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진 윤광준]

내 기억 속 초콜릿은 얇은 판 형태가 전부다. 국내 제과 회사에서 생산하는 인기 품목들의 대부분이 이렇게 생겼다. 안쪽 은박포장을 벗겨 손으로 떼면 사각형 조각으로 떨어지는 초콜릿 말이다. 이후 코코아 함량을 높이거나 개별 포장된 제품들이 나왔지만 판형 초콜릿은 여전히 주류였다. 초콜릿의 맛도 으레 그렇거니 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카카오의 씁쓸함이 여운으로 남긴 하지만 첨가된 우유에 더해진 단맛이 강조된다. 매끄러운 식감도 떨어지는 듯하다. 품목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획일화된 맛이란 점은 분명하다.

조카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과자 중 으뜸이 초콜릿이란 걸 알았다. 초콜릿을 사주면 유난히 좋아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즐거움이 내게도 전이됐다. 덩달아 나도 초콜릿을 먹게 된 계기다. 내 자식 키울 땐 차 안 시트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금기화 시켰던 초콜릿 아니던가. 초콜릿을 먹으면 히틀러처럼 포악해진다는 낭설도 있어 일부러 사 주진 않았다. 어쨌든 세월이 흘러 예전 같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초콜릿이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됐다.

사실 어른들을 위한 초콜릿의 용도는 하나 더 있다. 늦은 밤 혼술로 제격인 위스키 온 더 록에 곁들이는 안주다. 간편하고 위스키의 풍미를 해치지 않는다. 초콜릿 한쪽을 우물거리다 보면 단맛 효과로 스트레스도 진정된다. 일생의 3분의 1을 비행기 비즈니스석에서 보낸 친구가 전파해준 위스키와 초콜릿의 마리아주가 이토록 쓸 만한지 비로소 알게 됐다. 늦은 오후 나른하고 무기력해지는 느낌이 들 때 초콜릿 한쪽을 먹으면 반짝 깨는 듯한 효과도 실감했다.

살다보면 새로운 관심과 분야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후배가 초콜릿 매장에서 일하게 됐다. 낯선 초콜릿을 맛보게 된 계기다. 스위스에서 만든 ‘레더라’였다. 맛도 색깔도 견과류 토핑도 달랐다. 도대체 초콜릿에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맛이 나는지 신기했다. 후배의 해설과 책에서 본 지식을 더해 레더라를 탐구해보기로 했다.

질 좋은 헤이즐넛·아몬드 등의 견과류에 초콜릿 물을 부어 굳힌 ‘레더라’ 초콜릿은 내용물에 따라 표면 굴곡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진 윤광준]

질 좋은 헤이즐넛·아몬드 등의 견과류에 초콜릿 물을 부어 굳힌 ‘레더라’ 초콜릿은 내용물에 따라 표면 굴곡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진 윤광준]

레더라 초콜릿은 입에 넣자마자 녹아내린다. 매끄럽고 부드럽게 입 안을 감도는 맛과 향은 독특했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가서 꽤 큼직한 조각 하나를 그 자리에서 다 먹게 될 정도다. 그동안 먹어본 국내 제품과 일부 수입품 초콜릿과는 격이 다른 맛이다. 입맛이란 간사하다. 레더라 이전의 초콜릿을 무력화시켰으니까.

내 입맛으론 레더라의 간판격인 프레쉬스코기(FrischScohoggi·프레쉬 초콜릿)가 끌린다. 말 그대로 신선한 초콜릿인데 생긴 것도 남다르다. 질 좋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산 헤이즐넛이나 아몬드·블랙베리 등의 견과류에 초콜릿을 부어 굳혔다.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에 따라 굴곡을 만드는 널따란 크기의 초콜릿은 적당한 크기로 떼어낸다. 기계로 찍어낸 똑같은 모습이 아니다. 수제 초콜릿 느낌이 물씬 풍기는 비정형 조각들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살 때는 원하는 초콜릿을 골라 무게로 따져 값을 치르면 된다.

맛의 비결이 궁금했다. 초콜릿의 재료는 누구나 다 아는 카카오 열매인데, 제대로 재배한 양질의 카카오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레더라는 남미의 코스타리카·브라질·에콰도르·트리니다드 토바고나 아프리카의 가나·마다가스카르 등의 재배 농가에서 수확한 카카오를 직접 검수한다. 산지에 따라 특성과 맛이 다르지만 최상급 카카오를 쓴다는 점은 분명하다. 커피로 치면 스페셜티만을 고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확보된 카카오는 스위스로 옮겨져 세척 후 로스팅 과정을 거친다. 로스팅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의 변화를 알면 이 과정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겠다. 온도와 습도, 시간의 조화로 생기는 로스팅 과정은 미세한 오차마저 용납되지 않는다. 카카오 빈은 씻은 후 바로 로스팅해 가루로 만드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다. 반면 레더라는 적외선 드럼 속에서 먼저 말린 카카오 빈을 로스팅하는 방식을 쓴다. 제법의 차이는 좀 더 균일한 로스팅을 위한 선택이 된다.

로스팅 된 카카오 닙에 열을 가하면 코코아버터가 나온다. 이것이 초콜릿의 원료다. 세상의 모든 초콜릿은 여기까진 비슷한 공정을 거친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버터를 다시 가열해 코코아 매스라 불리는 초콜릿 베이스가 얻어지면 설탕과 향료를 더해 완제품이 얻어진다. 이 과정의 함량과 첨가제가 고유한 맛을 내게 된다. 사람의 몫으로 남게 되는 부분이다. 레더라는 밀크 초콜릿에 들어가는 우유로 알프스에서 방목한 젖소의 것만을 쓴다. 그것도 분유 상태로 첨가한다. 그래야만 부드럽고 풍미가 깊어진다는 이유다.

각 재료가 섞인 초콜릿 혼합물을 잘 섞고 미세화 시키면 균질한 부드러움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위스 정밀공업이 힘을 발휘한다. 오랜 시간 균일하게 짓이기고 치대는 과정이 필수여서 정확하게 작동되는 기계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판 형태의 레더라 프레쉬 초콜릿의 맛은 좋은 원재료에 엄격한 가공 기술이 더해진 결과라 할만 했다. 대개 먹거리의 비법을 말로 정리하면 이렇듯 싱겁다. 단순해 보이는 각 과정의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유지해 나가는 일이 더 어렵다. 드러난 성과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적절한 상태가 씨줄·날줄로 엮여야만 짜지는 좋은 비단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 과정엔 여전히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각자의 입맛이 모두가 수긍하는 맛의 객관화로 올라서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레더라 초콜릿의 맛은 결국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된 셈이다.

나의 초콜릿 선호는 레더라로 인해 굳어졌다.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당분 섭취를 극구 말리는 의사의 권고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유혹은 수시로 나를 괴롭힌다. 레더라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한 조각만 먹는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제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제 참다 문제가 되나, 먹다 문제가 되나 마찬가지인 나이 아니던가. 설마 죽기야 하겠어, 딱 한 조각만 더!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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