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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부 ‘별정직’ 맡아, 여관서 맥가이버처럼 온갖 과제 해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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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호 22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17〉 30년 공직 중 ‘제1 황금기’

1974년 국무회의가 끝난 후 중앙청 기자실에서 정치부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필자(가운데·당시 보도국장). [사진 김동호]

1974년 국무회의가 끝난 후 중앙청 기자실에서 정치부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필자(가운데·당시 보도국장). [사진 김동호]

1964년 공보부 행정주사로서 기획관리실을 거처 조사국 제1과에서 근무하던 당시 총무처가 주관하는 ‘3급 공무원 공개경쟁 승진제도’(공승)가 생겼다. 주사로 일정 기간 근무한 사람이 시험에 합격하면 사무관인 3급(지금의 5급)으로 임용하는 제도다. 공승은 고등고시 행정과(행시)와 함께 시험을 보고, 동일 과목은 출제와 채점을 같이 할 정도로 엄격해 합격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65년 제2회 시험에서 재정직 1명과 나를 포함한 행정직 9명이 2월 18일 합격 통보를 받았다. 1지망으로 상공부를 써냈지만 자리가 없어 나는 물론 그해 행시·공승 출신 지망자 누구도 가지 못했다. 6개월을 고민하다 공보부에서 다시 근무하기로 결심했다. 65년 9월 1일 공보부 행정사무관으로 임관해 문화선전국 국내과 간행계장으로 발령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현명했던 결정이었다. 다른 부처로 옮겼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71년 월남전 시찰단으로 첫 해외 출장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과 함께 일했던 직원들. 앞줄 오른쪽부터 윤 장관, 서종환, 필자, 오지철. 뒷줄 오른쪽부터 고 이종덕, 황현탁, 조원형, 이덕주. [사진 김동호]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과 함께 일했던 직원들. 앞줄 오른쪽부터 윤 장관, 서종환, 필자, 오지철. 뒷줄 오른쪽부터 고 이종덕, 황현탁, 조원형, 이덕주. [사진 김동호]

간행계장은 대통령 담화문을 포함해 정부의 각종 홍보 책자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는 업무를 맡았다. 나는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대한공론사와 만리동 광명인쇄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매일 원고를 쓰고 인쇄했다. 대한공론사는 53년 영어신문 코리아리퍼블릭을 창간했으며, 65년 제호를 코리아헤럴드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나는 공무원인지 인쇄소 직원인지 모를 정도로 활판인쇄부터 새로 나온 오프셋인쇄까지 경험하며 공장 직원들과 함께 작업했다.

68년 1월 31일 보도국 보도계장을 맡았는데, 그해 7월 24일 공보부가 문화공보부로 개편됐다. 그해 8월 2일 예술국 예술계장을 맡은 데 이어 70년 1월 15일 서기관으로 승진해 정부의 국내 홍보를 총괄하는 공보국 국내과장을 맡았다. 행정사무관으로 임관한 지 4년 4개월 만이었으니 동료들보다 빨랐다.

이듬해 월남전 시찰로 첫 해외 출장의 기회가 생겼다. 71년 4월 25일 대통령선거에서 당선한 박정희 대통령은 6월 4일 개각에서 김종필 국무총리를 기용하고, 문화공보부 장관에 윤주영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을 임명했다. 실·국·기관별 업무보고 직후 윤 장관에게 “전국 주요 문화원장들과 함께 월남전 시찰을 위해  모레 출국한다”고 보고했더니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겨우 승낙을 받았지만 18일간의 출장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월남전 시찰은 당시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이던 이관용 공주문화원장이 김용휴 국방부 군수국장에게 의뢰해 이뤄졌다. 김용휴 국장은 그 뒤 국방부 차관을 거쳐 총무처장관을 지냈다. 이관용 회장, 송두영·박경호 부회장, 서도영 사무국장을 포함해 10명의 문화원장과 국방부 합참 비서실의 황종우 대령에 나를 포함해 13명인 우리 일행은 VVIP급 대우를 받으며 거의 모든 파병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다.

리모델링한 ‘보안 여관’에서 일맥재단 최성우 이사장(왼쪽)과 함께. [사진 김동호]

리모델링한 ‘보안 여관’에서 일맥재단 최성우 이사장(왼쪽)과 함께. [사진 김동호]

6월 11일 C-24 군 수송기에 탑승해 김포공항을 떠난 우리는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하루를 지낸 뒤 사이공(현재 호찌민) 탄손누트(현 떤선녓 공항) 공항에 도착했다. 주월남 한국군사령부를 방문해 이건영 부사령관의 브리핑을 받고 전시장을 돌아봤다. 이세호 사령관이 주최하는 만찬을 마치고 사령부 숙소에서 사이공의 첫 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13일 군복으로 갈아입은 우리 일행은 군용헬기를 타고 조진성 소장이 이끄는 나트랑(현 나짱)의 백마부대와 십자성부대(김종달 준장)를 방문해 장병을 위문하고 영현봉안소를 찾았다. 14일엔 다낭의 청룡부대(이동용 준장)와 푸캇(현 푸캇)의 맹호부대(이희성 소장)를 방문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동기인 청룡부대 이동용 해병 준장을 전쟁터에서 다시 해후해 감회가 새로웠다.

15일 사이공의 주 월남대사관을 방문해 유양수 대사와 권경국 공보관이 주최한 오찬에 참석했다. 16일엔 건설지원단인 비둘기부대를 방문해 곽용철 준장과 오찬을, 저녁엔 이세호 사령관을 다시 만나 만찬을 각각 하고 일정을 마쳤다. 전쟁의 실상과 장병의 노고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7일 사이공을 떠나 12일간 태국·홍콩·대만·일본의 4개국을 거쳐 29일 귀국했다. 출장 중 본부의 실·국장급 인사 발령 소식이 들려와 내심 불안했다.

윤 장관이 재임했던 71년 6월 4일부터 74년 9월 17일까지 3년 3개월은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72년엔 7·4 남북 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 전국 비상계엄 선포(10월 17일), 국민투표에 의한 헌법개정(11월 21일), 제8대 대통령 취임(12월 1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창설(12월 23일)과 74년 육영수 여사 피격과 서거(8월 15일) 등이 이어졌다. 70년에 시작한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했고, 중화학공업 건설과 수출 증대에 역점을 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1970년 6월 월남전 시찰단이 탑승한 수송기 앞에서(뒷줄 오른쪽 셋째가 필자). [사진 김동호]

1970년 6월 월남전 시찰단이 탑승한 수송기 앞에서(뒷줄 오른쪽 셋째가 필자). [사진 김동호]

윤 장관은 한국 문화사에 남을 많은 일을 이뤘다. 문화예술중흥 5개년계획 수립과 문화예술진흥원 창설,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등으로 문예중흥의 기반을 구축했다. 장충동 국립극장 신축개관(73년 10월 17일),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 신축이전(72년 8월 25일)도 당시 이뤄졌다.

73년 3월 3일엔 국영방송이던 KBS를 공영화해 한국방송공사를 출범함으로써 방송 제도를 혁신했다. 73년 2월 남산의 KBS-TV 사옥을 여의도로 옮기고 남은 자리에 영사실과 녹음·현상시설과 촬영 장비를 갖춘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해 73년 4월 3일 출범시켰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이다. 국제교류재단의 전신인 해외홍보협회를 창설했고, 문화공보부 산하기관으로 재외공보관을 총괄하는 해외공보관을 신설했다.

지금까지 윤 장관처럼 창조적인 개혁 의지, 일에 대한 열정과 집념, 강한 추진력을 갖춘 분을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윤 장관 재임 중 보직을 여러 차례 옮겼는데, 자리와 상관없이 측근에서 최선을 다해 보필했다. 71년 8월 1일 문화국 문화과장으로 옮겨 문화예술진흥 5개년계획 수립,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문화예술진흥원 설립 등을 주도했다.

72년 4월 안중식 비상계획관이 미국으로 이주하자 윤 장관이 나를 불러 한직인 비상계획관을 맡아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서슴없이 이를 받아들여 일반직 서기관직을 사직하고 72년 5월 10일 ‘별정직 2급을(乙) 상당’의 비상계획관으로 발령받았다. 신분보장이 안 되는 별정직 이동은 모험이었지만 윤 장관과 함께 일한다면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비역 장성이나 영관급이 맡는 자리에 일등병 출신이 맡은 것도 전무후무했다.

약 1년간 비상계획관을 맡는 동안 사무실보다 밖에서 일한 때가 더 많았다. 종로구 필운동의 안부여관이 집이자 사무실이었다. 주사 시절에 자주 이용했던 통의동 보안여관은 오래전 일맥문화재단의 최성우 이사장이 사들이고 리모델링해 문화공간으로 조성했지만, 안부여관은 어떻게 됐는지 분명치 않다.

필운동 ‘안부여관’이 집이자 사무실

70년 5월 공보국 국내과장 재직 시절 KBS-TV에 출연해 박성범 앵커(왼쪽)와 대담하고 있는 필자(오른쪽). [사진 김동호]

70년 5월 공보국 국내과장 재직 시절 KBS-TV에 출연해 박성범 앵커(왼쪽)와 대담하고 있는 필자(오른쪽). [사진 김동호]

나는 안부여관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각종 계획서, 보고서, 브리핑 차트, 홍보 책자의 원고 작성과 인쇄, 대외 발표문안 작성 등 온갖 일을 맡아 마치 ‘맥가이버’나 ‘기동타격대’처럼 일했다. 밤새워 일한 결과물을 들고 아침 일찍 대방동의 장관 댁으로 가서 보고한 다음 다시 여관이나 사무실로 출근했다.

73년 3월 9일 문화공보부 직제개편으로 문화예술진흥관이 신설됐다. 나는 비상계획관 근무를 마치고 총무처의 서기관 특채시험을 거쳐 다시 문화공보부 서기관으로 복직했는데, 4월 5일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문화예술진흥관으로 발령받았다. 같은 해 10월 10일 문화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2월 6일 윤 장관께서 나를 찾아 그날부터 정부의 언론 주무국장이자 문화공보부 대변인인 보도국장을 맡으라고 했다. 언론사 정치부장들과의 오찬장소로 이동하는 승용차 안에서 이를 통보한 뒤 오찬장소에서 정치부장들에게 나를 보도국장으로 소개했다. 발령은 다음날 받았다.

윤 장관은 74년 9월 17일 퇴임했지만 나는 이원경 장관(74년 9월 18일~75년 12월 14일), 김성진 장관(75년 12월 19일~79년 12월 13일)을 거치면서 보도국장과 공보국장으로서 5년 4개월간 언론 주무국장 겸 대변인 역할을 했다. 보도국은 76년 12월 31일 직제개편으로 폐지되고 기능이 공보국으로 통합됐다.

윤 장관을 모셨던 3년 3개월 동안 나는 무려 여섯 가지 보직을 맡았다. 직급도 서기관에서 별정직 2급을(乙)과 부이사관을 거쳐 이사관으로 승진했다. 그때가 30년 공직생활 중 가장 다양하면서도 많은 일을 보람차게 했던 ‘제1의 황금기’였다고 자부한다. “나를 필요로 한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좌우명을 확립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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