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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면담·세미나 5개월 강행군, 문예중흥 청사진 마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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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24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18〉 문예중흥 5개년 계획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왼쪽)과 필자(오른쪽·문화과장)가 1972년 4월 김종필 총리(가운데)에게 현충사 정화사업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 김동호]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왼쪽)과 필자(오른쪽·문화과장)가 1972년 4월 김종필 총리(가운데)에게 현충사 정화사업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 김동호]

1971년 6월 4일 윤주영 장관이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부임한 직후 월남전 시찰(6월 11~29일)을 다녀온 나는 7월 18~24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북한 남침에 대비해 실시하는 ‘을지연습’에 참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각 부처를 돌며 대비상황을 보고받았다.

당시 공보국 국내과장이었던 나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브리핑 자료를 작성했다. 주사·사무관·서기관 때는 물론 이사관이 된 다음에도 직급이나 보직에 상관없이 새해 업무보고를 포함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브리핑’ 원고나 대외로 발표되는 장관의 연설문 초안은 도맡아 작성했다. 기획관리실장이 되기 전까진 ‘고스트라이터’(유령 연설문 작성자)를 겸한 셈이다.

윤 장관이 을지연습을 치르는 과정에서 눈여겨봤는지 8월 1일 나를 호출해 “대통령께서 취임사에서 문화한국 중흥을 새 정부의 국정지표로 발표하셨는데 문화과장을 맡아 이를 뒷받침하는 장기계획을 세워 보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날자로 문화국 문화과장으로 발령받았다. 과거 어느 정부에서도 장기적인 문화정책을 구상하거나, 정교한 문화정책을 발표한 적이 없었기에 난감했지만,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함께 작업할 인력부터 구했다. 문화재관리국의 정기영 사무관을 문화과로 옮기게 했다. 9월 15일자로 행시 10회 출신의 김순규·김태석·이성언·이해관·윤청하·서종환(늦게 발령받음) 등 여섯 명이 문화공보부로 발령받아 왔는데, 그 중 이해관 사무관을 문화과로 데려왔고 예술국 예술과로 발령받은 김순규 사무관을 차출해 작업에 참여시켰다.

72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공포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시절의 필자. [사진 김동호]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시절의 필자. [사진 김동호]

현실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려면 무엇보다 문화·예술계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의견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국 일간지·통신사·방송국의 문화부장과 문화담당 논설위원 및 주필, 문화·예술계 인사 등 676명의 명단을 작성하고 설문을 만들어 발송했다. 문화정책의 기조와 정신문화·전통문화·문화예술·대중문화·지방문화·문화시설 등 분야별로 중요하고 시급한 정책과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전수 우편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104명으로부터 925건의 의견을 받았다. 그만큼 문화계의 관심이 높았다. 이에 앞서 학술원·예술원·예총 각 분과의 공식 의견도 수렴했다. 특히 이선근·박종홍·박종화·홍이섭·곽종원·강원룡 등 원로 문화인과 예용해(한국일보)·석도륜·유한철·김수근 등 주요 인사 30명을 직접 찾아가 장시간 면담하면서 의견을 들었다.

9월 28~29일 이틀간 우이동의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문예중흥의 기본방향에 관한 세미나’도 열었다. 윤 장관이 문예중흥장기계획의 필요성과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정책 방향에 관해 기조연설을, 곽종원 건국대 총장은 ‘예술적 측면에서 본 문예중흥의 기본방향’에 대해, 역사학자인 홍이섭 교수는 ‘문화적 측면에서 본 문예중흥의 기본방향’에 관해 각각 발표한 다음 각계 인사의 토론을 거쳤다.

문화정책에 관한 해외 각국의 정책 자료도 수집했다. 때마침 유네스코 본부에서 70년부터 유네스코가 주관하는 ‘문화정책에 관한 전문가 회의’와 각국 문화부 장관들이 참석하는 ‘정부간 회의 자료’, 그리고 각국 문화정책에 관한 소책자들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백승길 부장의 도움으로 이 책자들을 입수해 우리가 도입할 수 있는 정책들을 정리했다.

우선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의견과 해외 각국의 사례들을 바탕으로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의 1차 초안을 만들었다. 그 뒤 11월 11~23일 이숭령·박종홍 등 15명으로 초안 검토 위원회를 구성해 3차에 걸친 수정 작업을 한 다음, 2차 초안을 만들어 12월 21일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보고했다.

2차 초안은 ‘민족문화의 전통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바탕 위에서 다양성 있는 서구 문화예술의 정수를 섭취, 새롭고 개성 있는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그 기조를 뒀다. 그러면서 1)민족문화의 계발, 민족사관 정립, 문화유산의 전승 지원 2)문화 창조 및 예술창작을 촉진하는 환경개선 3)예술의 생활화로 국민의 문화 향수권 신장 4)문화예술 국제교류의 적극화 5)지역 간 문화격차 완화와 지역문화 향상 등에 역점을 두고 사업계획을 마련했다.

특히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을 민간주도로 추진할 기구로 ‘문화예술진흥원’을 설립해 운영하기로 했다. 65년 발족한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과 국립인문기금(NEH)을 벤치마킹했다. 문제는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 지원에다 기업 후원까지 받아 운영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기업 후원을 기대할 수 없어 고심하다 눈을 돌린 것이 ‘극장 모금’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46년부터 극장 매출의 10%, 방송매출의 5.5%를 각각 국립영화원(CNC) 기금으로 적립해 영화·방송사업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를 차용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사실 65년부터 여러 명목으로 극장 모금을 해왔다. 69년엔 재해구호기금에 1863만원, 국민결핵예방기금에 1451만원, 청소년 보호센터 건립기금에 7483만원, 헬기 구입기금에 3766만원 등 총 1억 6868만원을 극장에서 모금했고, 70년엔 1억 4453만원 규모였다.

한국영화는 50년대 중반부터 69년까지 전성기를 누려 69년 연관람 인원이 1억 7034만명, 매출액이 109억 3670만원에 이르렀기 때문에 10%만 걷어도 10억원, 5%면 5억원의 모금이 가능했다. 이에 정부 보조와 함께 극장·공연장 등 입장료에 부과해 조성하는 ‘문예진흥기금’을 도입해 문화·예술 진흥사업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프랑스의 문화정책을 보니 일정 규모의 건축물을 조성할 경우 건축비의 5%를 미술·조각 등 장식물에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채택해도 좋을 것 같았다.

현장서 도출된 정책, 생명력 강해

문예중흥과 문화발전구상을 담은 각종 계획서들. [사진 김동호]

문예중흥과 문화발전구상을 담은 각종 계획서들. [사진 김동호]

이러한 정책과 제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면 ‘문화예술진흥법’과 시행령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즉시 초안을 마련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예술진흥 시책의 수립과 시행에 대한 의무규정을 만들고, 문화예술진흥원 설립과 문화예술진흥기금 운용을 하려면 문화공보부 장관이 극장· 고궁 등의 입장료에 부과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그래야 기부금품 모집금지법 적용을 피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문화예술진흥위원회 구성과 운영,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조성할 경우 건축비의 100분 1 이상을 회화·조각 등 미술 장식품에 사용하도록 하는 규정과 문화의 달(매년 10월), 문화의 날(10월 20일) 제정 등이 주요 골자였다.

이처럼 방대한 작업을 5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윤 장관의 명확한 방향 제시와 빠른 의사결정, 그리고 엄청난 추진력과 나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초안 작성을 마친 뒤 문화예술진흥법의 입법을 추진했다. 문화공보부 장관이 극장 모금을 할 수 있도록 한 특례 규정과 건축물에서의 회화·조각 등 설치 의무화 규정은 내무부·건설부와의 협의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끝내 관철했다. 이렇게 해서 문화예술진흥법이 국회 심의를 거쳐 72년 8월 14일 자로 제정, 공포됐다. 시행령과 문화예술진흥위원회 규정은 각각 9월 29일 자로 제정, 공포됐다.

이에 따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관악구로 이전(75년 1월)할 서울대 본부 건물에서 73년 3월 21일 개원했다. 다만 문화예술진흥법의 입법 과정과 문화예술진흥원의 창설 준비가 다음 해로 넘어갔기 때문에 5개년 계획은 74~78년으로 당초 예정보다 2년이 늦춰졌다.

73년 10월 15일 오후 5시 장관과 함께 청와대로 가서 박정희 대통령께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10월 17일 오전 11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신설 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 보고한 뒤 10월 19일 오전 9시 윤 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발표하고, 오전 10시 국회 문화공보위원회에 보고했다.

그해 10월 17일 신축 개관한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최초의 ‘문화의 날’인 10월 20일 오전 10시에 전국문화예술인대회가 열렸다. ‘문예중흥선언문’이 채택된 뒤 제1차 문화예술진흥 5개년 계획이 발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윤 장관과 함께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문예중흥 장기계획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정권이 바뀌거나 장관이 새로 부임하면 새로운 문화정책이 발표되곤 하지만 이때 마련했던 정책 기조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책상 위에서 마련한 정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도출된 정책이라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도 이를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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