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의 한 수입상가. 층층이 쌓여 하얗게 빛나는 접시들 곁을 지키는 70대 박민상(가명)씨의 낯빛은 줄곧 어두웠다. 그는 나흘 뒤 지난 31년간 한자리를 지켜 온 수입 그릇 가게를 폐업할 예정이다.
박씨는 “치솟아 내려갈 기약이 없는 환율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며 폐업 전 마지막으로 납부할 세금영수증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올해 초 달러당 1200원을 밑돌던 환율이 지금 1430원까지 갔다. 10달러짜리 그릇값이 2000원 이상 올랐다는 소리”라며 “남은 대출을 갚고 하루를 살아도 편히 살고 싶다”고 말했다.
고물가·고환율 속 피 마르는 수입상들
이날 원·달러 환율은 1431.3원에 마감됐다. 지난 22일 달러당 1400원 선을 넘긴 뒤 나흘 만의 1430원대로, 13년 6개월만의 최고치다. 지난 8월 미국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8.3%로 나타나는 등 고물가 기조도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수입 상가 상인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박씨가 취급하는 식기 중 하나인 ‘코렐’의 장미 무늬 밥그릇은 2017년부터 5년간 같은 가격을 유지하다 지난 6월 본사 방침에 따라 소매가가 25% 올랐다. 1만원이 안 되던 밥그릇이 1만2500원이 되자 거리두기가 해제 이후 느는 듯했던 손님들도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일부 상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진을 낮춰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숭례문수입상가에서 수입 식품을 판매하는 60대 고모씨는 취급하는 물건의 가격이 10~40%가량 올랐지만 쉽사리 소매가에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큼직한 허쉬 다크초콜릿(192g) 한 개는 3 100원이던 도매가가 3400원이 됐지만 고씨는 여전히 4000원에 팔고 있다. 손님 발길이 끊길까 걱정해서다. 고씨는 “1000원에 샀던 게 1500원이 되면 살림하는 주부들로선 얼마나 황당하겠냐”며 “사입 가격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고 그 다음날 다르다. 수백 가지 취급 품목을 조금씩 자주 주문할 수밖에 없어 고통이 더 크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고환율로 인한 체감 고통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하다고 호소한다. 그릇 판매상 박씨는 “당시에는 물가가 올라도 물건이 필요하면 어쨌든 남대문을 찾았는데 이제는 대형 마트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0년간 수입식품 가게를 운영해 온 노모씨는 “외환위기 때는 수입 분유, 수입 과자 등이 유행했었다”며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이 남대문에서 수입품을 찾았다”고 회상했다.
비싸게 팔려고·싸게 사려고…환전소 찾아
반면 수입상가에 멀지 않은 곳에서 환전소를 운영하는 정명수(62)씨는 하루가 부쩍 바빠졌다. 투명한 아크릴 가림막 너머의 정씨는 100달러짜리 지폐를 정리해 종이 끈으로 묶느라 분주했다. 코로나19를 겪는 동안은 손님이 60%가량 줄어들어 힘들었지만 이날 정씨 앞에는 줄곧 2~3팀이 대기상태였다. 정씨는 “달러를 팔러 온 손님이 평소의 2배는 된다. 달러당 1400원을 넘으니 사람들이 지금이 최고점이라고 내다보고 늦기 전에 매도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4000달러 이상을 매도할 경우 ‘외국환 매각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날은 이 신청서를 쓴 사람도 10명이 넘었다.
반대로 환율이 더 오를까봐 미리 달러를 사기 위해 정씨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정씨는 “여행이나 유학을 앞둔 사람들이 시중 은행보다 2~3원이라도 더 싸게 사기 위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인근에서 환전 좌판을 열고 있는 70대 여성 A씨도 “코로나 동안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많이 줄었는데, 최근 달러를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이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상당 기간 높은 물가 오름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원·달러 환율 상승이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국내 물가에 추가적인 상방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유의할 것”이라며 “원·달러 환율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 주요 통화 움직임과 과도하게 괴리돼 쏠림현상이 심화하는 경우 시장 안정화 조치를 적극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