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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만평 농사 풍년인데 年1200만원 벌 판" 농민들 호소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2일 전북 김제시 봉남면 송내마을에서 29년째 벼농사를 짓고 있는 조경희(54)씨가 다음 달 수확을 앞두고 벼가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을 가리키고 있다. 김준희 기자

지난 22일 전북 김제시 봉남면 송내마을에서 29년째 벼농사를 짓고 있는 조경희(54)씨가 다음 달 수확을 앞두고 벼가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을 가리키고 있다. 김준희 기자

전북 김제 호남평야 가보니…풍년인데도 농민들 시름

지난 22일 전북 김제시 봉남면 송내마을. 드넓은 호남평야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다.

김제에서 29년째 벼농사를 짓고 있는 조경희(54)씨는 이날 창고에 보관해 둔 콤바인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다음 달 수확을 앞두고 벼 베는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하기 위해서다. 처음엔 덜컹거리던 콤바인이 조씨가 뭔가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자 굉음과 함께 희뿌연 연기를 뿜으며 움직였다.

시운전을 마친 뒤 황금 들녘을 바라보는 조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올해 풍년인데도 쌀값이 45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데다 물가마저 올라 생산비조차 건지기 어려운 상황이어서다.

조경희(54)씨가 지난 22일 창고에 보관해 둔 콤바인에 올라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운전을 하고 있다. 김준희 기자

조경희(54)씨가 지난 22일 창고에 보관해 둔 콤바인에 올라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운전을 하고 있다. 김준희 기자

50대 소작농 "2만5000평 농사 지어도 年1200만 원 벌 판" 

소작농인 조씨는 2만5000평(8만2645㎡)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 조씨는 "현재 시세대로라면 나락(벼)을 팔아도 소득이 (2만5000평 기준) 1200만~1500만 원 수준이라 현실적으로 파산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농민이 수확을 앞둔 논을 갈아엎고, 삭발을 하고, 집회를 하는 건 제값을 받기 위한 노력"이라고 했다.

조씨에 따르면 논 1필지(1200평)당 들어가는 생산비는 평균 400만 원 정도다. 생산비 중 비중이 제일 큰 토지 임차료로 벼 12가마(80㎏ 기준 1가마당 20만 원씩 총 240만 원)에다 농기계 작업료와 농약·비룟값 등 160만 원을 더해서다.

1필지당 벼 생산량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평균 75가마(40㎏ 기준 총 3000㎏)가 나온다고 한다. 지난해 시세(40㎏당 6만6000원)대로 계산하면 대략 500만 원 수준인데, 현재 나락 값(40㎏당 5만 원)으로 따지면 375만 원으로 줄어 생산비(400만 원)를 빼면 적자라는 게 조씨 설명이다.

조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생긴 적자를 공익형 직불금(1필지당 80만 원) 등 농업 외 부대 소득으로 메워야 할 판"이라며 "2만5000평이 약 20필지니, 필지당 소득이 약 60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올해는 1200만 원가량을 손에 쥐게 된다. 이는 최저임금(시간당 9160원, 월 209시간 기준 연봉 약 2300만 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매년 비수기 때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는 등 농업과 관계없는 일을 해 버는 소득까지 포함하면 1년에 4500만~5000만 원을 벌었다"며 "생활비에다 갚아야 할 빚이 있어 1년에 최소 4000만 원 이상 소득이 있어야 살림을 끌고 나갈 수 있는데, 올해는 1500만 원 벌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김인중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이 2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쌀값 안정화 대책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산지 쌀값이 1977년 관련 통계를 잡기 시작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하자 정부는 이날 4차 고위당정협의회에서 10~12월 수확하는 올해 신곡과 지난해 수확한 구곡을 합쳐 총 45만t을 매입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김인중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이 2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쌀값 안정화 대책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산지 쌀값이 1977년 관련 통계를 잡기 시작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하자 정부는 이날 4차 고위당정협의회에서 10~12월 수확하는 올해 신곡과 지난해 수확한 구곡을 합쳐 총 45만t을 매입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정부 "올해 수확기 45만t 쌀 시장 격리" 발표 

다음 달 수확을 앞두고 쌀값 폭락과 물가 상승에 따른 생산비 부담으로 이중고를 겪던 농민들이 한시름을 덜게 됐다. 농림축산식품부가 25일 "올해 수확기(10~12월) 45만t의 쌀을 시장에서 격리한다"고 발표하면서다. 역대 수확기에 정부가 매입한 규모 중 가장 많은 수준이다. 시장 격리는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매입해 가격 하락을 방어하는 정책이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15일 기준 산지 쌀값은 20㎏에 4만725원으로 1년 전(5만4228원)보다 24.9% 하락했다. 1977년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로 가장 큰 폭의 하락이다. 정부가 올해 들어 2월 14일, 6월 13일, 7월 20일 3차례에 걸쳐 37만t의 쌀을 시장에서 격리했지만, 가격 하락은 멈추지 않았다.

쌀값이 연일 폭락하자 지난달부터 전북과 전남·충남·경남·부산·서울 등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이 수확을 앞둔 벼를 갈아엎거나 집단 삭발까지 하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해 왔다. 경기·강원·충북·충남·전북·전남·경북·경남 등 8개 지역 도지사들까지 나섰다. 이들은 지난 15일 국회에서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쌀농사가 흔들리면 농민 삶은 물론 식량 주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지난 21일 충남 논산시 상월면 논에서 논산시 쌀값안정대책위원회 농민들이 정부에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트랙터로 벼를 갈아엎고 있다. 뉴스1

지난 21일 충남 논산시 상월면 논에서 논산시 쌀값안정대책위원회 농민들이 정부에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트랙터로 벼를 갈아엎고 있다. 뉴스1

농민들 "물량 해소 도움…양곡처리법 개정안 반드시 통과"

정부는 시장 격리와 별도로 올해 신곡을 공공비축미로 45만t을 사들인다. 시장 격리 물량과 공공비축 물량을 합치면 총 90만t의 쌀이 시장에서 격리되는 셈이다. 90만t은 올해 예상 생산량의 23.3%에 이르는 물량이다. 정부는 이번 시장 격리로 쌀값이 적정 수준으로 회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부의 45만t 규모 쌀 시장 격리 조치에 대해 농민들은 "쌀 물량 해소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라며 "그간 해온 투쟁이 절반의 성과를 거뒀다"며 대체로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정부의 쌀 시장 자동 개입을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을 추진하는 데 대해 국민의힘과 정부가 "매년 쌀이 초과 생산되는 구조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는 상황에 대해선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 전라북도연합회 노창득 회장은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정부 발표로 올해 발등에 떨어진 불은 껐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쌀값 안정화를 위한) 장기 대책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여야의 협상 대상이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 전라북도연합회 노창득 회장을 비롯한 시·군 대표 18명이 지난 14일 전북도청 앞에서 정부에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사진 한국후계농업경영인 전라북도연합회

한국후계농업경영인 전라북도연합회 노창득 회장을 비롯한 시·군 대표 18명이 지난 14일 전북도청 앞에서 정부에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사진 한국후계농업경영인 전라북도연합회

야당 "양곡관리법 정기국회 통과" vs 여당 "시장 혼란"

앞서 민주당은 지난 15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했다. 26일 농해수위 전체 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둘러싼 여야 간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핵심 민생 과제로 포함해 정기 국회에서 통과시킬 방침인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 안이 쌀 시장에 외려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며 맞서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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