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음모론 부른 정부의 산은 이용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

음모론은 힘이 세다. 객관적 이유나 합리적 설명의 부재, 그로 인해 납득이 어려울 때 음모론의 힘은 더 세진다.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음모론이 쓰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음모론이 먹히는 건 나름의 개연성 때문이다.

우량기업 여신자산 민간이관 검토 #시중은행 길들이려는 ‘당근’ 의심 #본사 부산 이전, 총선 겨냥 시각도

산업은행을 둘러싼 각종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산은의 부산 이전 강행 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노조 및 직원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며 각종 시나리오와 설이 난무한다. 음모론이라 치부하더라도 여러 의혹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산은을 레버리지 삼은 정권의 노림수가 있는 듯 비쳐서다.

최근의 뜨거운 감자는 산은의 ‘영업자산 이관 시나리오’다. 강석훈 산은 회장이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언론 보도로 알게 됐고, 실체가 없다“고 밝혔지만, 이튿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당 자료를 공개하며 머쓱해졌다. ‘금융위원회가 정책금융기관의 우량·성숙 기업 여신을 시중은행 앞으로 이관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고, 이를 위한 여신 판별 기준 수립 의견을 요청해 왔다’는 게 내용의 골자다.

이에 따르면 산은은 전체 영업자산 243조7000억원 중 이관 대상이 되는 자산 규모를 106조5000억원 수준으로 파악하고, 신용도 최고 수준인 ‘알짜 회사’만을 골라 민간에 이관하는 시나리오 세 가지를 작성했다. 이 중 최대 18조3000억원 규모의 자산을 시중은행에 넘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금융위는 실무자의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와 관련한 금융위 자료를 보면 그 의도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국책은행의 우량·성숙 여신을 별도 데이터베이스(DB)화하고, 이른바 우수은행에 DB 접근권을 허용한다. 우수은행은 시중은행의 정책금융 협업 성과를 통해 매년 해당 기준 상위 2개 은행으로 선정한다. 우수은행이 DB상 기업과 자율 협상해 대환을 권유하고, 기업이 승낙하면 산은 등의 여신을 시중은행으로 옮긴다’는 내용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공약을 내세운 가운에 이의 추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공약을 내세운 가운에 이의 추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모습. [연합뉴스]

국책은행과 민간 분야의 갈등을 최소화하겠다는 국정과제, 말하자면 ‘민간 밀어주기’를 위해 산은의 돈 되는 ‘알짜 여신’을 ‘말 잘 듣는’ 시중은행에 넘겨주겠다는 셈이다. 산은 내부에서는 ‘우량 자산과 본점 부지를 시중은행과 특정 기업에 매각하고, 일부 중소기업 지원과 구조조정 부문만을 남겨 부산 이전을 하려는 것’이란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당근’을 앞세운 시중은행 길들이기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당장 배임과 현행법 위반, 민영화 및 특혜 가능성 논란이 불거졌다. 핵심 우량자산을 자발적으로 매각하는 건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0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은행법상 은행업이 자산 처분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부실매각 등으로 규정돼 있고, 우량자산을 넘길 땐 자산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며 “그런 절차 없이 (우량자산 이관) 지시를 하는 것도 법 위반”이라고 했다.

무리하다 싶게 속도전 양상을 보이는 산은의 부산 이전 추진은 총선을 위해서란 이야기까지 나온다. 강 회장이 ‘부울경'(부산·울산·경남)만 콕 집어 산은의 역할을 강조하며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부산에 산은만 가서 경제가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부울경 지역이 새로운 4차산업의 전초기지로 탈바꿈해야 하고, 산은 기능에 부울경 경제 활성이 추가된 걸로 본다”고 말했다.

고장난 시계처럼 ‘국정과제’란 답만 반복하며 합리적 근거나 건설적 설득이 없이 ‘까라면 까는 것’이란 태도는 음모론만 부추길 뿐이다. 강 회장은 “통화정책도 의미가 없어졌고 재정정책도 한계에 이르러 산은이 새로운 역할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선봉에 서기 위한 출발부터 의심의 빌미를 제공하는 건 현명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