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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경의 법률리뷰

법의 수호자인 여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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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은경 변호사

이은경 변호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70년 치세가 이제 막을 내렸다. 여왕의 서거에 대한 애도의 물결은 영국의 일상까지 멈춰버렸다. 장례식이 열린 웨스트민스터 사원부터 장지인 윈저성 묘지까지 시민 100만 명이 배웅했고, 여왕의 관이 도착하기 48시간 전부터 조문을 위한 긴 줄이 생겼다. 여왕이 성스러운 임무를 실현했고, 고귀한 인내를 감내했다는 칭송이 흘러넘쳤다.

지도자에 대한 아픔이 적지 않은 한국, 영국 시민의 밤샘 조문은 조금 낯선 장면이다. 국민을 하나로 모은 추모의 열기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뛰어난 리더십 때문이었을까. 여왕이 겸손과 자제의 미덕으로 국민을 이끌고, 나라의 위기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보였다는 칭찬은 언론마다 떠들썩하다. 여군에 입대해 영국 황실에 군역의 룰을 만든 일화도 유명하다. 그러나 여왕도 공과(功過)를 겸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다. 황실의 스캔들이 적지 않았고, 이런저런 구설도 뒤따른 삶이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은 벅찬 존경과 깊은 감사로 여왕을 떠나보냈다.

여왕은 신의 뜻 대리하는 인간
왕의 선정은 법의 수호에 달려
신의 영역인 재판은 공정해야
사람 눈치 보지 않는 재판을

법률리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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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기의 장례식 이면에 있는 국민의 의식이 궁금했다. 마침 눈에 들어온 단서는 영국 전역에 울려 퍼진 국가(國歌)의 내용이었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갓 세이브 더 퀸(God save the queen)’, 바로 여왕을 지켜달라는 기도문이다. 영국이 잉글랜드 성공회를 국교로 선포한 나라인 건 맞다.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는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과 정치적 문제까지 결국은 도덕적, 종교적 문제로 귀착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여왕에게는 만수무강을, 승리와 복(福)과 영광을, 여왕의 적들에게는 정치의 혼란을, 간교한 계략의 좌절을 달라’는 간구는 한 나라의 국가라고 보기엔 다소 놀라운 게 사실이다. 마치 국가를 영혼이 있는 실체로 생각하고 여왕을 국가로 치환한 듯 보였다. 나라가 망하면 그녀도 망하고, 나라가 흥하면 그녀도 흥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여왕은 신의 가호 아래 군림하는 존재, 바로 세상을 향해 신의 권위를 선포하는 인간 대리자였다.

특히 ‘여왕이 법을 수호하여 선정을 베풀게 해달라’는 구절에 시선이 끌렸다. 법률과 규범이 국가질서의 근원이고, 통치의 성패도 법의 수호에 달려있단 뜻이다. 실제로 영국은 법정 개시 전, 법관과 장관들, 왕실 고문을 포함한 변호사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여 공정한 재판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법의 권위를 선포하는 행진을 한다. 재판은 신성한 책무라는 인식이 강하고, 공정한 재판은 지도자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전통은 바이블에 등장하는 ‘모세의 결단’이 모티브였다.

모세는 BC 1450년경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노예로 살던 이집트를 탈출한다. 40년 넘게 험난한 위기를 극복하고 과중한 책무를 감당했다. 심지어 모든 백성의 재판까지 홀로 담당했다. 당연히 번 아웃이었을 거다. 드디어 모세는 “내가 어떻게 너희의 괴로움과 너희의 짐들, 너희가 다투는 것을 혼자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일갈한다. 종족마다 통찰력 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지도자로 뽑을 것을 주문하고, 천부장·백부장·십부장 제도를 도입해 이들에게 재판권을 주었다. 재판의 유래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재판이 신에게 속한 것이라 믿었고, 재판관의 자질은 물론, 재판의 준칙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모세는 재판관들에게 ‘자국민과 타국민의 구별 없이 분쟁을 잘 듣고 공정하게 판결하라,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말고, 낮고 높음의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우하라,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무 어려운 사건은 나에게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재판의 규범이 법 앞의 평등을 완성하고, 국가의 지도자를 법의 수호자로 만든 것이다.

여왕의 장례식은 법을 수호하고 국민을 결집하는 지도자를 희구하게 하고, 분열과 반목이 일상인 정치의 민낯을 고뇌하게 했다. 여왕이 누구의 낯도 의식하지 않는 재판을 당부했다는 건 울림이 컸다. 한국은 유감스럽게도 대법원장의 ‘사표 수리 반려’를 둘러싼 거짓말 논란이 수사선상에 올랐다. 국회 탄핵을 이유로 사표를 반려한 것도 권력의 눈치를 봤다는 비판이 거셌지만, 사법부 최고 수장의 국민을 향한 거짓 변명은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다. 형편없이 병들어 버린 도덕성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