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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도움 안돼” “학원이 더 낫다” 학생·부모 다 영재반 외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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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호 16면

길 잃은 영재교육 20년

“수업시간 내내 질문하거나 탐구하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학생들에게 ‘너희 이걸 왜 배우고 있니?’라고 물으니 대다수에게 ‘부모님이 시켜서 듣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들, 정말 노벨상을 탈 만한 영재인가요?” (서울 강남구 A 초등학교 교장)

“엄마가 시키니까 하긴 하는데 뭘 배우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영재학급이라는 건 알지만 내가 영재는 아닌듯해요. 수학시험 80점 맞은 적도 있어요.”(서울 성동구 B초등학교 서모군)

자칫, 교장 선생님과 학생의 대화로 들릴 수도 있는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영재교육의 오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재교육 20년. 영재교육 위기론이 퍼지고 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국가가 앞서 발굴해 키우겠다’고 한 게 영재교육진흥법의 구호였다. 하지만 현실은 ‘앞서’가 아니라, ‘뒤로’ 가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부터 거세다. 한 입시 컨설턴트 강사인 박모씨는 “영재과학고 진학하면 의대도 못 가게 막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겠나?”라며 “어차피 학원에서 더 배우면 된다. 영재교육에 목매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영재교육이 결국 입시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울교대 영재원 수강생인 초등학교 3학년 윤모 학생은 “영재원에 다니는 학생들 대다수가 같은 학원 영재원준비반 출신”이라며 “고1 선행 학습까지 마쳤기 때문에 영재원에서 배우는 내용 자체는 다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1만9974명이었던 국내 영재교육 대상자는 2013년 12만1421명을 찍은 뒤 하락세다. 2019년 10만명 밑으로 떨어졌고 지난해는 7만9048명이었다. 영재교육 기관 수도 2003년 전국 400여 곳에서 2013년 3011곳으로 정점을 찍고 지난해에는 1704곳으로 줄었다. 정점 대비 56% 수준이다. 한국영재교육학회장을 지낸 이정규 서경대 교수는 “영재교육 대상자·담당교원·기관 수가 일제히 줄어들었다는 것은 학령인구 감소만을 탓할 순 없다”며 “정부의 무관심과 예산 급감, 영재교육 중요성의 인식 부족이 낳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진보 교육감 지역은 지원 부족 더 심해

때문에, 영재교육 기관 인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9년 4.8%였던 과학고·영재고 진학 희망률은 지난해 4.4%로 줄었다. 같은 기간 일반고 (자율형 공립고 포함) 진학 희망률은 67.5%에서 71.9%로 증가했다. 영재과학고 입학 경쟁률도 일제히 하락했다. 8개 과학영재고의 평균 경쟁률은 2019년 15:1에서 지난해 6:1까지 떨어졌다. 2019년과 2021년 사이 학령인구가 807만4000명에서 770만명대로 약 5% 줄었지만, 영재교육 기관 진학 경쟁률은 60%가량 낮아졌다. 2020년부터 영재학교·과학고 중복 지원이 금지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영재학교 경쟁률이 줄어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사교육 1번지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도 영재교육원이나 영재과학고 입학은 이미 ‘엘리트 코스’에서 탈락했다. 대치동에서 20년 가까이 영재학교 입시 지도를 해온 김모(69) 원장은 “영재학교 TOP 3(한국과학영재학교, 서울과학고,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를 제외하고는 영재교육 받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며 “영재학교에서 올림피아드에 나가봤자 자기소개서에도 적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일반고에서 내신을 쌓고,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듣는 게 대입에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윤초희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대학입시에서 영재교육 이수 경험이나 각종 대회의 수상실적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영재교육 인기 하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재교육 인기가 시들해지는 사이 국제올림피아드는 톱클래스인 ‘서울과고’의 잔치가 됐다. 2017년부터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대표학생은 모두 서울과학고등학교가 독식했다. 같은 기간 생물은 37%, 화학은 50%, 물리는 88%가 서울과고생이었다. 시험을 통해 뽑는 올림피아드 참가자들이 수년째 한 학교에 집중된다는 건 다른 영재학교가 ‘개점휴업’ 상태라는 방증이다. 윤 교수는 “톱클래스 영재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가정환경이 좋아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이 대다수”라며 “특정 배경의 학생들이 영재교육에 쏠리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수도권 지역에서는 ‘영재 없는 껍데기 영재교육’이라는 말도 나온다. 영재학급 교사조차 영재학급을 의문시한다. 3년간 영재학급을 전담했던 교사 김모씨는 “영재학급을 유지하기 위해 머릿수만 채우고, 머리 쓰는 진짜 영재는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1%의 영재가 99%의 시민을 먹여 살린다고 하는데, 이런 땜질식 교육으로는 모두가 하향 평준화의 길을 걸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 ‘영재학급’이 영재교육 위기를 불렀다고 입을 모은다. 2010년, 교육부는 영재교육 대상자를 전체 학생 수의 1%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영재학급 붐이 일었다. 문제는 돈(예산)이었다. 영재학교·영재교육원은 정부·지방자치단체·교육청·대학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영재학급은 전액 수익자(학생·학부모)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학기당 적게는 10만원, 많게는 100만원이다. 학교로서는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이정규 교수는 “국가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목적으로 도입된 영재교육이 학부모 부담으로 이뤄지는 게 말이 되느냐”라며 “심화학습·현장체험·실험·실습 중심으로 진행하던 영재교육이 교실 안 토론 수업 수준으로 그치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싱가포르 영재교육 장학사 30명, 한국 1명

학부모들도 득보다 실이 많은 영재교육을 꺼린다. 중학교 1학년 아들을 둔 김성희(49)씨는 “똑같은 돈을 낸다면 영재학급·영재원보단 학원 보내는 게 낫다”며 “영재과학고에 입학하려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 이미 고교 수학 과정을 마치기 때문에 영재원 커리큘럼에선 흥미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전했다.

교사들도 잃는 게 더 많으니 볼멘소리가 커졌다. 서울 강북지역의 영재교육원에서 10년간 가르친 이모 교사는 “영재학급은 방과 후, 혹은 주말을 반납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교사들에겐 기피 업무”라고 말했다. 경기도의 장모 교사도 마찬가지다. “영재학급 도입 초창기에는 강사료도 상당했고 승진 시 가산점도 있어서 열정적인 선생님들이 많았다”면서 “하지만 수익자 부담 원칙 때문에 체험학습 한 번 가기도 꺼려지고, 이제는 한번 짠 교육과정으로 몇 년씩 재탕하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특히 진보 성향 교육감 지역의 경우 타격이 컸다. 교육 형평성을 내세워 영재교육의 예산을 줄이고, 평준화나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위한 교육만 늘어났다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 예산만 봐도 2019년 44억994만원 규모였던 영재교육 지원 예산은 2022년 34억2859만원으로 4년 새 약 10억원 상당의 예산이 줄었다. 서울시교육청은 131개의 영재학급을 운영하고 있지만, 관련 예산은 0원이다. 진보 교육감이 배출된 수도권 지역에서 영재교육 업무를 담당하는 모 장학사는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후 영재, 인재라는 단어조차 쓰지 못하게 했다”고 한탄했다. 이정규 교수는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교육 포퓰리즘에 빠져 영재교육을 등한시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영재교육의 질적 하락이 영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상위 1~2%의 학생들을 선별해 가르치는 교육방식이 마치 기득권을 위한 ‘귀족교육’으로 치부됐다는 것. 이재호 경인교대 컴퓨터교육과 교수(한국영재학회장)는 “지금 영재교육에서 가장 시급한 개선 사항은 ‘인식의 전환’”이라며 “영재교육이 국가경쟁력 강화와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고, 기여할지는 무시한 채 특권층·사교육을 운운하니, 지원이 축소됐다”고 전했다.

한국은 수학계 최고 권위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를 또다시 배출할 수 있을까. 이정규 교수의 답이 단호하다. “영재교육이 이대로라면 허준이 교수 같은 영재는 나올 수 없습니다. 허 교수도 한국 교육시스템에선 영재성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국에 가서야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만 15세 학생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도 한국의 영재교육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PISA 조사결과 한국 학생들의 읽기 소양은 2006년 이후, 수학과 과학 소양은 2012년 이후 하락세다. 주목할 점은 타 국가보다 상위권 학생의 비율은 낮고, 하위권 학생의 비율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재교육의 미래는 어떨까. 내년 수립할 제5차 영재교육진흥종합계획이 분수령이다. 윤 교수는 “인공지능·4차산업혁명 등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춰 영재교육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할 때”라며 “튀는 한명보다, 다양한 재능을 갖춘 학생들이 상호의존하며 인간의 삶에 무엇이 유용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재호 교수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며 “영재교육 참여를 통해 승진 가산점을 부여하고, 인센티브가 있어야 능동적인 커리큘럼 설계와 교육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친 이정규 교수가 허 찌르는 한마디를 더했다. “싱가포르 교육부에 영재교육을 담당하는 장학사만 30명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요? 교육부 영재교육 담당자는 한 명밖에 없어요. 교육부 장관도 공석인 나라에서 뭘 바랍니까. 결국 피해는 미래세대가 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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